지난해 여름, 태풍이 예보되던 날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 현장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옥상에서 농성 중인 이들이 위험하다고 했다. 병원 측은 물도, 전기도 공급할 수 없다고 했다. 태풍을 막을만한 그 어떤 안전도구도 반입해줄 수 없다며 안전하고 싶으면 당장 옥상 농성을 중단하고 내려오라고 한다 했다. 병원 측이 너무 강경하여 농성자들의 생명권과 안전권이 위협당하고 있다 했다. (관련기사=폭염·태풍 속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인권단체, “수돗물, 전기 공급”(‘19.8.6))
찾아간 농성 현장은 태풍이 아니라 대충 바람에도 위태위태한 구조물 아래 두 명의 간호노동자가 있었다. 한여름 40도가 훌쩍 넘는 대구의 시멘트 열기 위에 몸을 얹고, 중간중간 공급되는 생수병과 보조배터리로 밤을 새고 목을 적시고 있었다. 그들은 내일 당장 태풍이 몰아닥쳐 목숨이 위험해진다 하더라도 내려갈 수는 없다며 강경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이 한여름 대구의 열기와 태풍 앞에서도 지키고자 했던 것은 노동권이었다. 부당하게 해고당하지 않고, 부당한 노조탄압을 당하지 않을 권리였다. 농성하는 단 두 명의 권리를 위함이 아니라 모든 동료 의료노동자, 더 나아가서는 노동하는 이 사회의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권리투쟁이라고 했다.
같은 공간에서 2020년 또 다른 권리 투쟁이 진행됐다. 이번 농성의 주인공인 의대생들과 의사들은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정책에 대한 투쟁을 진행했다. 집단으로 진료를 거부하고, 병원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의사 국가 고시도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 사이 제때 진료받지 못한 환자들의 사망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그랬던 그들이 스스로 거부한 국가고시 응시를 요구하며 다시 투쟁하겠다고 한다.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투쟁을 하였고, 같은 공간에서 1년 후 어느 누군가는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투쟁을 진행했다. ‘투쟁’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각은 다를 것이다.
어떤 권리 주장을 위한 투쟁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을 만큼 간절한 상황은 아직도 너무나도 많다. 내가 가진 것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권리를 쟁취한 역사는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된 역사는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투쟁의 역사로 이루어졌다. 나를 위함이 아닌, 나와 내 동료, 우리 사회를 위한 투쟁이었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올랭프 드 구주가 단두대에 목숨을 바쳤고,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전태일은 불길 속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하고 노동하고 있다. 그들이 담보한 것은 타인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