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특별한 감동을 전달한다. 지친 심신을 위로하거나, 넓은 세상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어서다. 성찰로 인간관계를 짚어보는 순기능도 있다. 여행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많은 생각을 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다 보면 어느덧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다. 다양한 이유 중에서 로맨스 영화가 여행을 활용하는 소재는 주로 상실감 극복이다.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찾은 낯선 곳에서 특별한 인연을 맺는 설정은 클리셰 정도로 흔하다. 남녀의 로맨틱한 만남을 그리기에는 여행만 한 게 없다.
<카오산 탱고>는 배낭여행족의 성지라고 불리는 태국 카오산 로드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했다. 김범삼 감독은 10여 년 전 박준 작가의 <온 더 로드,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고 취재차 떠난 경험을 토대로 영화의 각본을 썼다. 카오산 로드는 방람푸 시장 가까이에 자리한 곳으로 짜오프라야강과 방람푸 운하를 끼고 있다. 동남아 여행의 모든 출발지가 되고 거의 모든 종착지가 되는 곳이다. 부담 없이 즐길 거리가 많은 것 외에도 다양한 문화유적과 관광지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경 1~2㎞ 내 볼 게 너무 많다. 카오산 로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박물관은 동남아에서 흔치 않은 소장품이 다량 전시된 곳이다. 이곳에 태국 미술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는 불상을 만날 수 있다. 도보로 5분이면 왕궁과 에메랄드 사원 왓 프라깨오를 만날 수 있는데 역대 국왕들이 기거했던 왕궁과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사원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원의 본당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상,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웃 나라 라오스의 비엔티안에서 가져온, 차크리 장군의 전리품으로 전해져오는 이 불상은 국왕의 수호신으로 숭배받을 정도다. 외국인과 내국인들이 방문하는 첫 관문이 되기도 한다. 카오산 로드의 방람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유람하듯 다녀올 수 있다. 왓 포 가까운 곳에도 선착장이 있다.
밤이 되면 카오산 로드의 매력은 더욱 높아진다. 온갖 제품들이 골목에 진열되고 색색의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야시장 같기도 하고 클럽 골목 같으면서도 카페촌이기도 하다. 최신 유행하는 음악부터 60년대 전 세계를 떠돌던 유행가들이 뒤섞인 밤은 꽤나 운치 있다. 시원한 맥주잔을 나누며 그 밤에는 세상의 거의 모든 대륙의 사람들이 여행을 채워 나간다. 카오산 로드는 한 번쯤 들렀다면 자주 생각날 것이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거리의 모든 것들이 당신을 유혹할 것이다. 카오산 로드에 짐을 푼다면, 문화유적지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보다 카오산 로드 자체의 매력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다.
지하(홍완표)는 영화감독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태국 방콕을 찾는다. 굳이 카오산 로드인 이유는 몇 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이 형수와 사랑에 빠진 곳이기 때문이다. 형을 잃은 상실감에 젖어 있는 지하는 무작정 방콕에 도착하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전혀 모른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지하는 하영(현리)을 만나 특별한 동행을 한다. 하영 역시 여행자다. 그는 한국과 방콕을 오가며 산다. 영화 내내 하영이 왜 이런 삶을 사는지나 어떤 과거를 겪었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과거에 머물러 사는 지하의 시선에서 관찰된다. 지하의 기준에선 하영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다. 지하는 어떤 이가 경험한 과거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다가, 하영을 만나면서 과거에서 벗어난다. 과거의 일들을 들으며 같이 공유하지만, 결국 그것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건 현재이기 때문이다.
지하와 하영이 처음 만난 곳은 게스트하우스다. 그리고 여권과 짐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 지하 앞에 하영이 다시 나타난다. 하영은 지하에게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제안하고, 빈털터리가 된 지하는 하영의 일을 돕는다. 동행으로 지하와 하영의 사이는 가까워지고, 호감이 피어오른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오해로 둘은 다툰다. 하지만 이내 지하는 하영이 화난 이유조차 모른 채 사과한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외면하는 하영에게 마침내 태국에 온 진짜 이유를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상실감이라는 공통된 정서에서 서로 이해하게 된다. 김범삼 감독은 “마음속의 상실감, 낯선 여행지의 달뜬 분위기,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과 서로 함께 하는 동안 서로에게 주는 치유 등을 이 영화는 음악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카오산 탱고>는 이병헌 감독의 페르소나로 이름을 알린 <힘내세요, 병헌씨(2012년)>의 병헌을 연기한 배우 홍완표와 재일 동포 배우 현리가 주연을 맡았다. 현지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어 카오산 로드, 왓아룬 사원, 짜오프라야강, 암파와 수상시장 등 태국의 관광 명소들이 담겨 있다.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송크란 페스티벌’ 기간 중에 촬영되어 전 세계에서 축제를 즐기러 온 인종, 성별, 연령이 각양각색인 여행자들이 등장한다.
아쉬운 점은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전개 자체가 밋밋한 데다 연출도 섬세하지 않아 홍완표와 현리의 연기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슬픔의 순간을 견디고 인생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여행의 치유에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사람은 현재를 살면서 늘 과거를 돌아본다.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아픈 기억으로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이런 기억을 안고 여행을 떠난다. 과거를 잊기 위해, 과거의 추억을 다시 한번 느껴보기 위해서다. 지나간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다 잘 짜인 각본과 연출로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