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홀로 작업하다 파쇄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죽음은 슬프게도 반복된다. 2018년 컨베이어벨트에서는 김용균이었고, 지금은 또 다른 김용균이 산업 현장에서 죽어나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 수준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산업안전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 2015년 기준 ‘노동자 십만 명당 치명적 산업재해 수‘는 한국 5.3, 영국 0.8, 독일이 1.0으로 아직 한국은 다른 선진국보다 산재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노동인권’은 ‘노동법의 범위에서‘ 정하고 있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제적 권리(협의의 노동인권)와 더불어, 노동할 권리, 노동 관련 사회보장 및 노동을 통한 인격권 실현의 내용, 안전하게 일할 권리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노동법‘은 노동인권 실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법제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법을 비롯하여 개별적 노동관계와 노동3권을 보호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회보험으로써 사후적 보상을 위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무수히 많은 법령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무수히 많은 법들이 존재하는데도 산재 사고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들여다볼 것은 노동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는 ‘범위’이다.
다양한 산업 현장의 종류, 규모에서 모든 상황을 법적으로 규율할 수 없는 ‘입법적 한계’가 존재한다. 입법자들은 ‘최소한의 권리와 기준’을 제시하여 사업장 상황에 따라 ‘법에서 제시한 기준’보다 ‘더 나은 조건’의 작업환경을 조성하라는 취지로 노동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즉, 노동법은 노동자의 노동조건, 노동3권 등을 보호받고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와 기준’을 정한 법이다.
문제는 노동 현장의 주체들(사업주, 노동자, 행정당국, 입법자)이 ‘노동법’의 관점에서만 노동 현장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특히, 사업주와 행정당국은 ‘최소한의 권리와 기준’을 정하고 있는 노동법을 ‘준수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그러다 보니 ‘더 나은 조건’의 작업환경을 조성하라는 본래의 입법 취지를 몰각하곤 한다.
근래에 근무시간과 과로에 대한 부분이 이슈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뇌심혈관계질환(뇌졸중, 심근경색 등)에 대해서 과로가 있는 경우에 산재로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만성 과로의 경우 발병 전 12주간 1주 평균 근무시간이 60시간이 넘는 경우에는 과로로 인정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1주 최대 52시간으로 근무시간을 규제하고 있지만, 과로의 조건 기준이 60시간이라는 점은 암묵적으로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노동법’에 따라 1주 60시간 이상 일하면 과로로 보고 있으니,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기준’에 따라 1주 최대 52시간을 근무시키면 ‘과로’하는 근무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독일은 1년 노동시간이 한국보다 700시간 적다. 프랑스는 주당 노동시간이 35시간이며, 1일 최대 10시간, 1주 최대 48시간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벨기에는 주당 노동시간이 38시간이면서, 연속성을 가지는 프로젝트 사업에 허용하는 시간은 최대 11시간, 주 50시간이 상한이다.
노동법만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건강한 산업 현장을 조성하여 노동인권을 지킬 수 있는 작업환경을 만드는 데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노동법은 산업현장에서 적용해야 할 최소한의 기준만을 정하고 있을 뿐, ‘노동인권 감수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인권 감수성의 의미에 비추어보면 ‘노동인권 감수성’은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자극이나 사건에 대해 매우 작은 요소에서도 노동인권(일할 권리, 건강하게 일할 권리, 노조할 권리 등)을 발견하고 적용하면서 고려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노동법상 근무시간을 최대 52시간으로 정하고 있지만, 1주 40시간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근무를 수행토록 노력한다거나, 유해한 물질에 노출되는 시간과 양이 노동법을 위반하지 않지만, 안전마스크 착용, 국소 배기장치 설치 등 추가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한다던가, 단독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노동법을 위반하지 않지만 안전을 고려하여 2인 1조로 작업을 배치하는 것들이 노동인권 감수성을 고려한 것이다.
노동인권 감수성을 가지고 작업 현장을 고려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노동 현장의 주체들이 ‘내가 어떤 조건에서 노동하면 건강한 노동을 제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 현장을 조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례로 지인이 공장을 운영하며, 야간에 혼자 라인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빗자루로 작동 중인 컨베이어를 청소하려고 하다가 빗자루가 컨베이어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본인도 컨베이어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고 한다. 그때 지인은 ‘야간에 혼자 이렇게 죽겠구나’라는 공포감에 휩싸였고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후 직접 나서서 안전장치를 설치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했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안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건강한 작업환경 조성과 노동법 준수까지 이어진 사례이다. 노동인권 감수성은 작업 현장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도 필요하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노동자 스스로 쟁취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의 요구가 수용되기에 어려움이 있다면 노동조합을 조직한다거나 사회적 연대를 통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어 더 나은 작업환경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노동조합은 산업안전보건관리에 있어 노동자 위원으로 참석하거나, 개선사항을 요구한다거나, 산업안전보건과 관련된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업장에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당장 나의 일은 아니지만, 산업재해 당사자는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 친구, 이웃이 될 수도 있다. 산업재해에 공감하고 산업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야 할 충분한 이유일 것이다. 내일은 부디 또 다른 김용균이 생기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