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유월의 한복판. 한 달 넘게 기다린 단비가 장대비가 되어 가문 땅을 적신다. 물방울들은 대지의 목울대를 세차게 울리며 마른 흙과 도시 곳곳의 보도블럭 사이로 꿀꺽꿀꺽 타고 들어간다. 물러갈 기색이 없는 바이러스와 일상화된 공포, 일찍 찾아온 폭염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 잠시 생기가 돈다.
지난 5월, 경북 청송의 시원한 밤바람 속에 울려퍼지던 우렁찬 노랫소리를 떠올린다. 청송의 한 폐교에 자리잡은 ‘나무닭움직임연구소’ 강당에서 ‘연극 전태일’ 시연회가 5월 내내 진행되었다. ‘연극 전태일’은 이제 6월 18일 서울 구로에서 출발해 경북 경산을 거쳐 전국 각지를 찾아간다. 이 장기 불황에 관의 지원없이 자발적 우정과 연대로 밥을 모아 대장정에 나선다.
코로나19의 재난으로 사막화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이 공연에는 젊은 예술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16명의 배우들은 두 달 동안 ‘연극 전태일’의 장면들을 창조적으로 만들어왔고 지금 첫 무대를 앞두고 있다. 매일 터져나오는 수도권의 산발적 감염 소식과 질본 브리핑, 불안의 확산에 배우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엄격한 거리두기의 방역 지침으로 좌석이 반토막나고 발열체크와 문진표 작성 등 번거로운 절차를 감수해야 하지만 어쨌든, 첫 공연 좌석은 매진되었다.
구로에서 코로나19의 수비를 잘 뚫고 7월 초 경산시민회관으로 씩씩하게 내려오길 바란다. 전태일이 누구던가. 끈질긴 가난, 야경꾼의 단속, 숱한 해고와 사업주, 정보기관, 관청의 훼방에도 결국 다음 목적지로 걸어가던 ‘맨발의 청춘’ 아니던가.
‘기쁨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연극 전태일’의 대구경북 추진위원으로 시연회를 두 번 보았다. 무대에 오른 연극의 ‘결과물’을 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은 드물지만, 작품 준비 과정과 중간발표를 보는 것은 보다 입체적인 감동을 안겨준다. 연극의 ‘형성 과정’을 생생하게 쳐다보고 땀냄새를 맡으며 장면에 살이 붙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청년 배우들과 밥도 먹고 함께 공연을 평가하고 뒤풀이를 하다보면, 그들의 온몸과 눈빛에 새겨져 있는 진한 예술 노동의 무늬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연극 전태일’은 웅장한 서사음악극이다. 내용 전개의 큰 축을 담당하는 밴드의 라이브 연주와 노래들이 압권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는 장중한 테마곡은 극 초반에 관객들의 마음에 밑간을 친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은 깊어진다. 드레스를 갖춰 입은 밴드의 마담은 이따금 마당극처럼 불쑥불쑥 극 중 추임새를 넣으며 감칠맛 나는 논평을 노래로 불러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꿰맨다.
16명 가운데 10명이 전태일 역을 맡았다. 여성이 셋, 남성이 일곱. 20년 전 30주기 공연의 바탕을 살렸다. 10명이 돌아가면서 전태일 역을 하면 산만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것은 괜한 우려이다. 오히려 전태일을 열 군데서 바라보니, 그의 삶의 순간들이 더 잘 들여다보인다.
이 서사적 ‘거리두기’ 장치는 보는 내내 관객을 새로 시작하게 한다. 나는 장면마다 다른 전태일에 집중하기 위해 더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배우들은 자신이 전태일이 아닌 장면에서는 근로감독관, 야경꾼, 사업주, 시다, 미싱사, 다른 재단사로 변신한다. 각혈미싱사는 어느새 마녀가 되어 갈지자로 무대를 휘젓는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우람한 사업주가 높은 곳에 서서, 나래비 선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채용하는 인력시장에 신문 속보가 뿌려지는 장면. 1970년 10월 7일,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헤드라인으로 평화시장 이야기가 신문에 나자, 젊은 노동자들은 세상이 제 것인 양 환호성을 지르며, 삼동회원들은 300부를 사서 시장통에 뿌리고 다녔다. 연극 전태일은 이 장면을 매우 감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모든 배우가 합창하는 ‘기쁨의 노래’는 강당의 공기를 사방팔방으로 밀어붙이며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어깨가 들썩인다.
나왔네! 드디어 나왔네.
우리 이야기 신문에 나왔네.
평화를 반 토막 낸 평화시장 다락방에서,
시들어간다네 폐가 썩어간다네. (중략)
귀 기울여주게 긴 굶주림과 싸움 끝에 터져 나온,
불길하고 어두운 기삿거리를 귀 기울여 주게,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 특히 10대 여공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청소년의 귀가를 권하는 라디오 방송이 나와도 집에 가지 못하는 여성노동자들은 몇 날 며칠 밤샘 노동에 시달리며 잠 쫓는 약과 조악한 식사를 징검다리 건너뛰듯 넘어가는 깡마른 발육기를 보내고 있었다. 먼지구덩이 다락방에서 몇 년 동안 폐병 걸리도록 일하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해고! 휴직과 해고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는 이 재난의 2020년으로 관객의 마음은 연결된다. 연극의 장면들은 50년 전 평화시장의 순간들을 묘사하지만, 끊임없이 지금 여기의 고민을 상기시키고 자극한다.
2020년 5월 22일
연극의 마지막 시연회를 보러 대구에서 퇴근해 청송으로 달려간 것은 5월 22일이었다. 그날 오전에 일어난 한 사고는 익숙한 단신으로 사람들의 바쁜 일상 속에 던져졌다. 광주에 있는 영세한 폐자재 활용업체에서 일하던 26세 김재순 씨가 대형 수지 파쇄기에 걸린 폐기물을 제거하려다 미끄러져 파쇄기에 끼여 사망했다는 단신.
3급 지적장애인인 청년은 혼자 일하다 변을 당했다. 회사 측에서는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고 답했다.(이 얼마나 익숙한 공식인가) 일이 너무 힘들어 1년 전에 그만두었다가 다시 3개월 만에 복귀해 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장애인 청년 노동자가 갈 수 있는 마땅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수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린, 따로 살던 아버지가 와서 깡마른 얼굴로 사람들과 나란히 섰다. 이 공장에서는 6년 전에 목재 파쇄기에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 당시 근로감독관이 다녀간 것이 마지막 지도감독이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단신은 매일 먹는 밥처럼 이어지는 중이다. 어제는 여수 산업단지 지하 90m 터널 작업을 혼자 하던 30대 미얀마 노동자가, 울산에서는 현대차 하청 노동자가 기계 오작동으로, 이틀 후인 오늘은 쓰레기차 회전문에 용역업체 청소노동자가 죽었다. 이렇게 단신으로나마 기사화되고 알려지는 것마저 일부일 뿐이다.
‘노동건강연대’에 따르면, 지난 5월에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는 58명이다. 한국사회의 독보적인 산재사망 통계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요즘 아침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에는 몇 달째 공익광고가 나온다. 산업현장에서 작년에만 850명이 사고로 사망 산재사망에는 질병과 사고가 있는데, 정부의 통계는 사고만 이야기한 것이다. 2019년 산재 사망은 질병과 사고를 합쳐 2,020명에 달한다.
했기에 고용노동부와 안전관리공단에서는 영세사업장을 점검하는 ‘특별한 방문’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다. 자못 비장한 배경음악 덕분에 숙연해지지만, 의문이 이어진다. 이 광고가 반복하는 추상적인 약속과 음악은 과연 세상을 실제로 바꿀 것인가.
오늘의 작은 구원을 위해
글쎄, 결과는 알 수 없다. 일어선 사람들은 승리의 결과를 보장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냥 억눌려 살 수가 없어, 그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오늘의 작은 구원을 위해 싸운다. 연극에서 전태일들은 그것을 ‘꼭 이룰 희망’이 아닌 ‘쓰러질 희망’이라고 표현했다. 패배주의인가? 아니다. 압도적인 폭력 구조 안에서 싸우는 이들의 냉철한 판단이다. 잘 안 될 걸 알면서도 가는 철저한 싸움의 정신이다.
평화시장 기사 특보 장면의 ‘기쁨의 노래’와 메아리를 이루는 또 한 곡의 노래 “쓰러질 희망을 위해”는 둥둥 북소리 위에 얹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는 장면을 떠받치는 행진곡풍 노래이다. 저마다 대화하듯 한 대목씩 이어가는데, 여덟 번째 전태일은 이렇게 힘주어 부른다.
“친구여 이제 생각해 보니 지상에서 딱 하루 산 것 같네.
지금은 그 하루의 마지막 밤. 새벽을 위해 밤을 버릴 시간,
눈물도 한숨도 나의 것이 아니네, 먼지 속에서 땀으로 만난 친구여”
다 함께 이어 부른다.
“이제 분노와 슬픔을 거두고 사랑으로 가세.
우리 사랑 덧없이 스러진다 해도 사랑만으로 가세.
꿈 꾸고 또 다시 쓰러질 희망을 위해 재 끝에 피어날 희망을 위해”
희망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희망의 조건이 가장 절망적일 때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벅찬 노래이다. 함께 본 사람들 중에 이 장면에서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느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만, 모든 장면을 소개하기 전에 마음의 불을 꺼야겠다.
평화시장 여공들에게는 반갑고 달콤한 휴식시간이 있었다. 바로 공장에 전기가 나가 몇 시간 동안 들어오지 않는 정전이었다. 각혈미싱사가 피를 토하고 해고된 후 그 자리에 앉아 몇 년을 1번으로 일한 표독미싱사는 깊은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마스크를 쓴 시다들에게 겉멋만 들었다며 “공순이 주제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고 먼지 나면 마시고!”라며 타박하며 시다들의 마스크를 벗기는 순간 전기가 나간다. 이때 시다들은 창문을 열어 빛을 들인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전기가 나가자 창문을 열어 작업장을 밝힌 1번 시다가 기침하는 표독미싱사에게 마스크를 건네자, 결국 미싱사는 시다의 이름을 묻는다. 기적적인 통성명. 하지만 표독미싱사는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말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의 진짜 제목은 “네 이름은 무엇이냐”이다. 이 연극은 서로의 이름을 묻자고 한다. 단 하루도 일을 쉴 수 없는 물류센터 일용직 노동자들의, 무급휴직에 이어 권고사직을 당하고 있는 이웃 사람들의, 그리고 이 재난 속에서도 기능경기대회를 준비하다 세상을 떠난 고등학생의, 일터의 갑질과 성추행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진 여성노동자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매일 죽어서 세상을 나가는 이들의 이름을 묻자고 한다. 그들은 세상의 들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정전되었다. 우리는 지금 막막한 심정으로 갈림길에 서 있다. 분위기도 안 좋은데, 시다들만 남은 작업장에서 무엇이 즐거운지, 맘보춤을 추는 전태일의 뒤태가 보인다. 전태일들이 옷감을 재단해 여성노동자들이 만들던 “서울 물건”들은 국내 기성품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수십 년이 지나, 제주와 대구, 안산과 서울에서 달려온 젊은 예술노동자들은 팔려나간 전태일의 옷들이 되돌아온 것처럼 모여 옷깃을 펄럭이며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창문을 열어두자. ‘연극 전태일’의 바람이 먼 데서 불어와 당신의 이름을 거듭 물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