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아래, 계약직 아래, 파견직 아래, 그다음에 그냥”
지난 27일 오후 3시 대구시 동구 한 카페에서 만난 강서윤, 한혜원 씨는 자신의 직장 내 위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서윤 씨는 출근 전, 혜원 씨는 퇴근 후였다. 이들은 대구MBC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노동자다.
전국언론노조 대구MBC비정규직다온분회는 지난 2019년 1월 처음 노조를 만들었다. 지역 방송국 내 비정규직 노조가 생긴 것은 처음이다. 다온분회는 두 달째 대구MBC 앞과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대구MBC는 다온분회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고 즉시 교섭에 응하라!”
“방송계 프리랜서 멋있잖아요?”
10년 동안 대구MBC만 다녔다
휴일도 ‘알아서’, 휴가도 ‘알아서’
서윤 씨는 올해로 10년째 대구MBC 보도국에서 자막 CG를 만들고 있다. 대구MBC 뉴스, 시사 프로, 스포츠 중계까지 보도국 모든 프로그램은 서윤 씨 손을 거친다. 혜원 씨는 올해로 6년째 대구MBC 기술국에서 주조정실 MD로 일하고 있다. 방송 화면을 송출하고, 방송사고를 대처하는 역할이다.
방송계에서 프리랜서는 한 방송국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여러 방송사를 넘나들며 일할 수 있는 이들을 쉽게 떠올린다. ‘프리 선언’을 하고 입사했던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승승장구하는 아나운서들이 우리에겐 익숙하다.
서윤 씨는 “이 회사에 와서 알게 된 프리랜서는 일반적인 거와 다르다. 방송계 프리랜서는 좀 멋있잖아요. 그런 걸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며 “프리랜서니까 자유롭게 근무하라고 하지만, 뉴스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에 맞게 출퇴근해야 한다” 고 설명했다.
서윤 씨는 매일 2교대, 기술국 혜원 씨는 3교대로 근무한다. 자막 CG 작업은 서윤 씨를 포함해 3명이 도맡고 있다. 지난 2월 대구시에서 매일 코로나19 브리핑을 할 때는 오후 4시 출근 시간이 오후 2시로 당겨지기도 했다.
혜원 씨 사정도 마찬가지다. 24시간 돌아가는 주조정실은 휴가 일정을 빼기 더 어렵다. 혜원 씨는 “회사는 어느 부서나 우리가 프리랜서니까 알아서 하면 된다고 한다. 휴가를 간다고 해서 대체 인력을 구해주지 않는다”며 “만약 우리 중 한 명이 휴가를 갔는데, 당일 근무자가 갑자기 아파서 못 나오는 상황이라도 되면 방송 사고가 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휴일근무수당이나 시간외수당, 야간수당 등 각종 수당도 받은 적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수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월급 명세서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혜원 씨는 “월급 명세서를 달라고 해봤었는데, 프리랜서라서 줄 의무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저희는 야간에도 일을 하니까 그런 수당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데 월급에 다 포함돼 있다고 하더라”며 “수당을 어떻게 받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월급에 수당이 포함된 거면 기본급은 얼마라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2년 전, 마지막 임금 인상
MBC 파업 승리가 노조 결성 계기
“정규직 노조는 당연, 우리는 왜?”
다온분회가 노조를 결성한 것은 지난 2017년 MBC 파업이 계기가 됐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공영방송 총파업에 나섰다. 뉴스 제작이 없으니 당연히 자막 CG 작업도 없었다. 파업이 이어지는 4개월 동안 서윤 씨는 고정수입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규직 노조와 함께 파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도 없다. 그저 파업을 응원하고 빨리 일을 할 수 있길 기도했다.
서윤 씨는 “파업 때문에 뉴스가 다 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고정수입이 없었다. 4개월 동안 너무 큰 압박을 받았다. 있는 적금 없는 적금을 다 끌어다 썼다”며 “2012년 파업도 겪었지만, 그때는 어려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파업은 심지어 노조가 이겼다. 못 받은 임금을 다 달라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보상은 기대했다. 그때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막 CG팀에서 노조 결성 이야기가 나오고, 회사는 임금인상 카드를 내었다. 주급 기준 4만 원 올랐 다. 기술국 MD 프리랜서는 월급 기준 10만 원 올랐다.
혜원 씨는 “제가 올해 6년 차인데 임금이 딱 두 번 올랐다. 박근혜 정부 때는 최저임금이 낮아서 지금 받는 임금에 대한 합리화라도 했었다”고 말했다.
노조 결성을 준비하던 윤미 다온분회장은 다른 국 프리랜서들을 만나러 다녔다. 윤 분회장은 서윤 씨와 같은 자막 CG 작업을 한다. 이때 혜원 씨와 다른 국 소속 프리랜서를 처음 만났다.
혜원 씨는 “보도국 자막CG 선배들 사이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을 때 저희 팀은 도급직으로 바뀐다는 얘기가 있었다. 도급직이 되면 4대 보험도 있고, 퇴직금도 나오니까 혹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없던 일이 됐다”며 “그때 분회장을 처음 만나서 서로의 처우를 알게 됐다. 그때 다들 마음이 통했던 거 같다”고 말했다.
혜원 씨도 “정규직 노조는 당연한데, 비정규직 노조는 특히 지역사에는 없었다. 노조가 만들어진다는 거 자체에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노조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두려움이 컸다. 서윤 씨는 “그냥 노조라는 자체가 무서웠다. 저는 천성이 귀찮은 걸 싫어해서 돈 올려달라고 하고, 아니면 그만둘 생각이었다”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규직들은 입사하면 자연스럽게 조합원이 된다. 저보다 늦게 입사한 정규직도 파업 나가서 투쟁하는 걸 보니 내가 뭘 무서워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연차 쌓이면 임금 오르고
주말에 일하면 수당 받는
평범한 노동자이고 싶어
지난 2월 사측은 자막 CG 프리랜서 주급으로 지급하던 임금을 프로그램 건당 바우처로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온분회는 반대 성명을 내고, 피켓팅을 하며 교섭을 요구했다. 결국 바우처 지급을 막았다. 다만, ‘대구문화방송’ 명의로 입금되던 임금은 ‘자막료’로 입금되고 있다.
노조 결성 후 계약해지 및 퇴사한 조합원 4명은 퇴직 후,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넣어 미지급된 수당과 퇴직금을 모두 받아냈다. 혜원 씨는 “퇴사하면서 자기 권리를 안 찾고 나가는 사람은 모르는 거다. 회사가 알아서 찾아주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다온분회는 65일째 사측에 교섭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고 1인 시위 중이다. 이들은 교섭에서 요구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묻자 “평범한 것”이라고 답했다.
“연차가 많은 사람이 임금을 더 받고, 주말에 일하면 주말 수당 받고, 초과 근무하면 시간외수당 받고, 유급 휴가도 주고, 4대 보험 들어 주는 거요. 일반 회사에 입사했을 때 받는 평범한 것들이요. 근로기준법에 나오는 노동자가 받아야 할 것들이요” -강서윤
“저희도 노동자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요” -한혜원
서윤 씨는 “회사는 항상 바쁘고 어렵다. 그래서 우리 순서도 항상 밀린다. 같이 10년을 넘게 일했으면 이 자리도 방송에 꼭 필요한 자리”라며 “모든 조합원들 업무가 없으면 방송 송출이 어렵다. 우리도 구성원으로서 존중받고 싶다”고 토로했다.
대구MBC에는 없는 ‘다온’
“다른 비정규직이 부러워요”
노조 결성 후, 걱정과 달리 지지와 응원도 많이 받았다. 피켓팅을 하고 있으면 커피를 나눠주는 직원도 있었고, 기프티콘을 보내는 직원도 있었다. 정규직 노조와 민주노총 대구본부를 비롯해 민주노총 산하 노조의 연대도 받았다.
다온본회는 민주노총 대구본부와 함께 코로나19 사태로 각종 정부 지원에 사각지대에 놓인 특수고용노동자, 청년, 이주 노동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기자회견을 열었다. 다온분회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고용보험을 적용해야 한다고 발언에 나섰다.
이들은 내심 당일 저녁 대구MBC 뉴스에 나오길 기대했다. 대구MBC는 평소 비정규직 문제를 꾸준히 보도해왔기 때문이다.
혜원 씨는 “그날 취재 나오셨던 기자님께서 저희 분회장한테 응원도 해주셨다고 해서 고마웠다. 내용이 어떻게 보도될까 희망도 있었다”며 “뉴스 전에 리포트를 보도국 조합원들이 제일 먼저 보는데, 한 컷도 안 나와서 정말 놀랐다. 전체 컷에만 걸렸다. 이해는 하지만, 씁쓸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대구MBC는 아사히글라스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를 많이 보도한다”며 “모든 언론들이 그렇다. 바로 옆에 같이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데, 우리를 빼고 논하는 모습이 모순인 거 같다”고 꼬집었다.
‘다온’은 “좋은 일이 다 온다”는 뜻이다. 다온분회는 이름처럼 언젠가 올 ‘좋은 일’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