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술자리.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목표와 방향을 잃는다.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 해 온 영화감독의 돌연사로, 막 촬영을 앞둔 영화 제작이 무산되면서다. “시집은 못 가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평생 할 줄 알았는데···” 영화에 대한 순정 하나로 살아온 찬실의 인생은 완전히 꼬여버린다. 제작사 대표는 영화를 세상을 떠난 감독만의 예술이라고 믿으며 찬실의 존재를 경시한다. “영화PD가 뭐하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명확하지 않은 찬실의 대답. “영화PD요? 돈도 끌어오고, 사람도 모으고 그런 일 합니다” 오랫동안 해온 일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찬실은 방황한다. 연애도 마다하고 오로지 일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갑자기 꿈과 목표, 계획을 잃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돈도 집도 남자도 없고 일마저 끊긴 찬실은 높은 언덕에 위치한 셋방으로 이사한다. 찬실을 맞는 집주인 할머니 복실(윤여정)은 무심한 듯 살뜰하게 그를 챙긴다. 살길이 막막해진 찬실은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가사도우미로 취직한다. “언니, 돈 빌려줄까?”라는 소피의 제안을 찬실은 당차게 거절한다. “아니! 일해서 벌어야 한다” 소피의 집안일을 보던 찬실은 소피의 프랑스어 교사 김영(배유람)을 만나게 된다. 그가 현재 시나리오를 쓰는 단편영화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김영과 가까워지며 설레는 썸도 탄다. 찬실은 유쾌하고 낙천적인 태도로 어떻게든 일과 삶과 사랑을 이어가려고 고군분투한다. 일상의 감정들은 모과처럼 무심히 무르익어 잔향을 남긴다.
‘영화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 때 자신이 영화 <아비정전> 속 홍콩배우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유령(김영민)이 나타난다. 어딘가 허술한 그는 찬실 곁을 맴돌며 이렇게 말한다. “찬실 씨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 영화는 사건보다 찬실이 보고 느끼는 것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개성이 뚜렷한 찬실은 살면서 경험할 법한 수많은 비극의 틈새로 소소한 웃음을 주입한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좌절과 위기를 얘기하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기 위해서다. 딱한 처지가 된 찬실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찬실에게 의지하는 설정이나,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 위로 쇼팽의 <장송 행진곡>이 흐르는 장면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복선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홍상수 감독의 PD 출신 김초희 감독의 영화다. 그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 PD로 일한 탓에 홍상수 사단으로 통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그가 영화 현장에서 프로듀서로 일했던 경험이 녹아 있다. 제작진의 회식 등 일부 장면은 홍상수 감독 영화가 연상된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김 감독이 일을 그만두면서 구상한 이야기다. 그는 ‘사람들이 살면서 맞는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방법은 없는가’ 고민하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각 인물들의 이름에 나름의 의미를 담았다. 찬실은 빛날 찬, 열매 실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마흔이 되도록 여전히 이렇다 할 결실을 보지 못한 찬실을 위한 이름이다. 소피는 근심 소, 피할 피의 한자 이름이다. 김영은 젊음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따왔다. 복실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을 말한다.
영화 관람평에는 ‘꿈꾸는 이들을 따뜻하고 낭만적으로 위로한다’, ‘누군가 대신해 주는 것 같은 내 이야기, 사려 깊게 위로받았다’는 반응이 나온다. 가장 암담한 시간을 버텨내는 원동력이 거창한 게 아니라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소소한 일상의 보석 같은 순간과 그 순간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영화에서 일깨우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며 이번 생은 망했다고 여기는 이들의 앞에 사려 깊은 위안을 전해주는 듯하다. “의지를 갖고 뭘 하려 해도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져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KBS독립영화상, CGV아트하우스상까지 받으며 3관왕에 올랐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