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3) 눈

18:15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글에서 인용한 ‘눈’은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김수영은 ‘시’에 대한 시를 몇 편 남겼다. 민음사 판 전집에 의하면 1961년 5·16쿠데타의 후유증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쓴 작품이 있고, 1964년에 쓴 짧은 작품과 몇 해 전 발굴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발굴된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는 나쁜 시만이 가슴에/남는다/그것도 아무도 꺾지 않는 꽃이다”.

지금껏 「눈」이라는 작품에서 사람들은 시인의 고고한 양심 혹은 청교도적 순결성 같은 것을 읽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눈”이 눈(雪)만이 아니라 시선(perspective) 혹은 관점이라 읽기도 했다. 일단 김수영에게서 청교도적 순결성을 읽는 오랜 해석은 내가 생각하기로 철저한 오독이다. 그것은 일군의 자유주의적 비평가들이 자신의 내면 상태를 김수영에게서 주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눈”을 시선 혹은 관점으로 읽는 해석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환기시키기는 한다. 아마도 “눈은 살아 있”고, “눈더러 보라고”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읽었지 않았을까 싶다.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한 짧은 언급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우라의 경험은 그러니까 인간 사회에서 흔히 불 수 있는 반응 형식을 무생물이나 자연이 인간과 맺는 관계로 전이시키는 것에 기초한다. 시선을 받은 사람이나 시선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선을 열게 된다.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여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벤야민에 기대 말하면 이 시에서 “눈”이 만일 시선 혹은 관점도 의미하는 것이라면, 김수영은 “마당 위에 떨어진 눈”에게 “시선을 여는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된다. 시에서는 물론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어쩌면 우리가 시를 쓰거나 읽을 때 바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지경일 것이다. 그래서 시는 혁명을 품을 수도 있고 지극히 반동적인 세계로 퇴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해석도 이 시에서 말하는 “눈”의 내포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시에서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마당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는데 그것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라는 점이다. “마당 위에 떨어진”이라……. ‘내리다’도 아니고 ‘오다’도 아니고 ‘쌓이다’도 아닌 ‘떨어지다’라는 동사를 김수영은 왜 택했을까. 물론 시적 화자는 마당에 쌓인 눈을 보고 착상을 얻었음이?틀림없다.

나는 숱한 시론가들이나 미학자들이 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보고 들은 것이 많지 않아서?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는 현실 세계에서는 비가시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누구는 그 시가 작품화되는 순간을 ‘불쑥’ 솟아오른다고 비유하고 누구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고도 한다. 전자든 후자든 공통적인 점은, 시가 작품화되는 순간은 시가 비가시적 세계에서 가시적 세계로 몸을 내민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 비가시적 세계는 공간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감각이 비가시/가시적 세계에 대해서 공간감각을 발휘할 뿐이다. 그렇다면 시가 어디인가에서 떨어진다고 하면 하자가 있는 것일까? 당연히 거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도리어 위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은 강력한 은유이기도 하다.

「눈」이 쓰인 같은 해인 1956년에 김수영은 「구름의 파수병」이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전집에 실린 순서를 봐서는 시기적으로 「눈」보다 앞서 있다. 그 시에서 김수영은 자신이 “시와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시를 반역한 죄로”.

결국 「구름의 파수병」도 시에 대한 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시와 괴리된 채 살고 있음을 괴로워한다. “시와 반역된 생활”이란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쓴 말은 아니다. 김수영에게는 생활 자체가 시여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공자의 생활난」에서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는 1960년 어느 날의 일기에서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적은 적도 있다.

「눈」에서 “눈”은 바로 김수영이 의식하고 있는 “절대적 완전”으로서의 시를 가리킨다. “절대적 완전”으로서의 시는 그러나 현존하지 않고 아주 잠깐 지상에 머물 뿐이다. 그 “절대적 완전”이 잠깐 시인의 영혼에 머무는 순간에 시인은 작품을 완성하다. 물론 그 완성은 허물어질 운명을 갖는다. 하지만 그 짧은 완성의 순간은 시인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사실 김수영은 죽음이라는 사태에 대해서 매우 예민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신동엽의 「아니오」에 대한 소감에서도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참여시의 정리」)고 상찬한 적이 있지만 일단 1964년의 작품 「말」에서도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시에서 “눈”이 살아 있는 이유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인 것은 김수영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이미 1950년대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서 김종철은 1973년에 쓴 김수영론에서 예리하게 짚은 적이 있다. “김수영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그의 의식은 어떤 점에서 詩作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인지도 모른다.” “죽음에의 남다른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일상의 피상적인 경험의 갈래를 좇아 허우적거리지 않았고, 그러한 여러 경험의 의미를 근본에서 꿰뚫어 볼 수 있었으리라는 점이다.”(「시적 진리와 시적 성취」) 다만 아쉬운 것은, 물론 그 당시에는 다른 자료들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김수영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원인에 대해서 “정확히 언제 왜 죽음에의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신비이다”라고 한 점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하여 확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더듬어보는 일은 할 수 있고 어쩌면 이 행위가 진정한 읽기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김수영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한국전쟁과 포로수용소 경험, 그리고 한국전쟁 때 잃은 두 동생에 대한 기억은 그를 죽음의 그림자가 쉬 놓아주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김수영은 그 그림자에 눌리지 않고 역으로 자신의 삶과 시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무튼 1956년 어름의 김수영은 생활과 시의 사이에서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당에 쌓인 눈을 보고 (혹은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그 눈을 자신의 거울로 삼았던 듯하다. “살아 있”는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기침을 하자”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질타이지 당대 문단을 향한 비난은 아니었다. (당대 문단을 향한 독설은 김수영이 4·19를 지난 뒤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만일 이 시에서 “눈”이 시를 의미한다면 더 이상 복잡한 논의와 분석은 무의미해진다.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는 “시와 반역된 생활”도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자는 능동적 의지로도 읽힌다. “시와 반역된 생활”이 따로 있고 시와 합치되는 생활이 따로 있다는 이분법의 통쾌한 해체의 조짐 말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구름의 파수병」보다 인식론적으로 한 걸음 나아간 작품에 해당한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이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는 진술은 이제 시가 우리가 사는 현실, 즉 가시적인 세계의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젊은 시인”은 현실에 받은 모멸과 상처를 시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기침을 하”는 게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기침”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는 바로 현실에서 받은 모멸과 상처가 남긴 침전물이다.

우리가 이 시를 이렇게 해석했을 때 “나쁜 시만이 가슴에/남는다”는 다른 「시」의 의미와 연결되게 된다. 물론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눈”을 시에 대한 알레고리로 꼭 읽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의 습관은 우리의 상상력을 협량하게 한다.

시는 본질적으로 음악이기 때문에 의미를 접어두고 있는 것도 시 읽기의 좋은 방법이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