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이 일본에 마스크를 보내기로 했다. 일본만 생각하면 분노와 슬픔에 가슴이 저리지만, 어려움에 부닥친 일본 시민을 두고 볼 수 없어서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故 이화섭 씨의 딸 이윤재(77) 씨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이 씨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인근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故 이화섭 씨는 19살의 나이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가 3년 만에 사망했다. 아버지 소식은 같이 끌려갔다가 생환한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큰아버지 밑에서 자란 이윤재 씨는 아버지 이름 석 자를 불러보지 못한 심정이 아직도 가슴에 사무친다. 아버지 지인이 전해준 엽서와 사진은 때늦은 천붕지통의 심정을 일깨웠다. 아버지는 아침에 받는 주먹밥 하나로 하루를 버티며 강제노역을 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는 받지 못했다. 사과는커녕, 아직도 일본은 아버지에게 할당된 당시 임금 5,827엔을 공탁금으로 묶어놓고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윤재 씨는 일본 시민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일본 시민들도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연대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 정부에 대한 적대심과는 별개로 강제징용 피해 유족으로서 코로나19에 피해받는 일본 시민의 마음도 더 와닿았다.
이 때문에 이윤재 씨를 포함해 일제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 유족들은 일본에 마스크를 보내기 위해 나섰다. 유족들이 각자 마스크를 확보하거나, 현금을 내기도 했다. 마스크 모집을 주도하는 일제피해자공제조합은 모집 규모나 전달할 단체를 아직 선정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릅니다. 아버지 이름 석 자를 불러보지 못한 가슴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일본 정부만 생각하면 뼈저리게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는 피해자니까, 일본 시민의 피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유족을 돕는 일본 시민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사람들끼리 마음을 열고 도와야 합니다.”(이윤재 씨, 일제피해자공제조합 부이사장)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1930년대 후반 남양군도에 비행장을 지으려 해군 군속으로 조선인을 끌고 갔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故이화섭 씨처럼 끌려간 조선인이 1939~1941년 최소 5천 명 이상이다. 끌려간 조선인은 비행장 건설, 사탕수수 재배 등에 투입됐다. 이들은 혹사, 굶주림에 죽거나 태평양전쟁 발발 후 폭격에 사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