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ICT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세상사는 여러모로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혹은 새로운 기기가 나올 때마다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과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이 교차한다. 그런 희망과 비관의 교차로 속에서 기술의 변화는 사회와 조응하면서 정착되기도 도태되기도 한다.
보통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권리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그 생각에 부합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예제를 끝장내고 여성을 일터로 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종주의와 가부장제에 일격을 가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발전이 모두의 인권에 기여하는 것은 발전 과정이 아니라 그것이 끝나고 정착되었을 때다. 되려 급속한 발전은 러다이트 운동에서 보듯 기술발전 과정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차별과 배제라는 심각한 인권 침해를 유발한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청와대 국민청원에 공공도서관에서 본인명의 휴대폰, 아이핀이 없는 이들도 가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장이 올라왔다. 비록 청원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청원 내용은 노인, 발달장애인, 어린이들이 2014년 이후로 아이핀과 휴대번호 인증으로만 회원가입이 되는 시스템에서 차별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해당 청원내용에 따르면 도서관에 찾아온 노인은 나라에서 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해줄게, 이 주민등록증이고 이걸 나라에서 줬는데, 나라에서 하는 도서관에서 이걸로 가입이 안 되는 게 옳은 거냐’라고 말했다. 나라가 기술소외자를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너무 완벽한 논리와 부적절한 현실에 큰 울림을 느꼈다.
이 청원에서는 도서관 이용 문제를 지적했지만, 정보화 사회라고 자화자찬하는 우리사회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 스마트폰이 없다면 코로나 사태에서의 여러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획득하는데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상에서 제공되는 모든 공공기관들의 정보에 대한 접근이 너무나 불평등하다.
나는 종종 이 불평등을 인지불평등 또는 정보접근의 불평등이라고 부른다. 기술이 변화시키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외되고 공공자원에 접근이 떨어지는 현상, 나는 이것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인권침해 또는 차별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면 이런 정보접근에서 소외되어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주로 노인들이나 일상적 의사소통이 어려우신 분들이다. 예를 들어 법원에서 서류가 왔는데 무료법률상담을 해줄 수 있냐고 묻곤 한다. 그래서 법률구조공단을 안내하면 그곳이 뭐하는 곳이냐,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이냐 등의 내용으로 상담을 요청한다. 간단하게 안내를 해드리면 너무나 감사하다고 고마운 곳이라고 말씀하신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데도 고마워하셔서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이다. 이런 경우의 대다수는 시민단체를 알아서 전화하기보다는 114에 문의해서 114가 시민단체를 연결한 케이스이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다행인 케이스다. 산재, 임금체불, 부동산, 인종차별, 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요청해오지만 60%가량은 해당 공공기관이나 절차를 몰라서 요청해오는 경우다. 나조차도 잘 모르는 영역일 경우 그 분야를 가장 잘 아는 단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만 시민단체라는 단어조차 낯설어 집에서, 거리에서 해매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폐지를 줍는 어르신이, 매일매일 아픈 몸을 이끌고 노동시장에 나가는 중년의 노동자가, 일정의 시간만 활동지원사가 오는 장애인이, 가난한 어린이가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하게 세상에 접촉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단지 소외가 아니라 말그대로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이며,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국가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책도 필요한 시민들에게 제대로 가지 못한다. 정책효과가 발현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애초에 잘못된 정책도 있을 수도 있고,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고 등등 하지만 그것을 누려야 할 시민들이 정책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능력과 환경,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정책도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모든 주체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듯이 우리는 오늘날 모든 시민이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인터넷의 정보를 손쉽게 접하고 사용한다는 어떤 특정한 인간의 유형을 표준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표준형, 평균의 인간이라는 것은 결과이고 통계일 뿐 구체적인 사람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표준과 평균의 인간에서 벗어날수록 사회와 국가에서 소외되는 단절된 사람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찾아내고 인식해야 한다.
이처럼 단절된 사람들에게 국가기관의 혜택과 정보의 접근, 공공자원의 향유권리는 중요한 권리이다. 단지 이들이 인터넷을 하지 못한다고, 스마트폰을 하지 못한다고, 정보화사회에서 편입되지 못했다 하여 이들의 방치해서는 안 된다. 1987년에 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헌법에서는 “기본적 인권”의 확인 및 보장 의무를 국가에 부여하고 있는 만큼 정부는 정보약자, 인지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추신. 이글을 써야 하는 기간동안 대구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우체국, 약국, 편의점 등 곳곳에서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제 한 몸 간신히 이끌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이었다. 특히나 가난하고 나이가 들수록. 이처럼 정보의 비대칭성의 강화는 사회 전체의 합리성과 신뢰를 갉아먹고 각자도생의 인권 따위는 사치인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