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은 52만 부 이상 팔린 동명 논픽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저자는 김충식 작가로 동아일보 기자 시절 3년여간 취재한 내용을 1990년 8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18년간 벌어진 일들을 10명의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정리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초헌법적 기관이 저지른 국가권력의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 징수, 미행, 도청, 고문, 납치 등 온갖 공작을 파헤쳐, 한국 정치사의 이면을 들춰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책은 880쪽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는 대통령 암살까지 40일간의 이야기로 추리고 영화적 상상력을 더했다.
김 작가는 영화 개봉에 맞춰 추천사를 공개했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1960~1970년대의 독재 18년은 중요한 시대다. 18년을 지배한 정점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할 정도로 권력을 누렸던 중앙정보부에 대해 1990년대까지 모든 매체가 보도를 꺼렸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막중한 권력을 휘두른 이들에 대해 기자가 보도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 생각해 사명감을 갖고 집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핵심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뒤흔든 10·26 사건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권력 핵심이 왜 거사를 도모하게 됐을까.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혁명한 것” 내란목적살인죄로 법정에 선 김재규의 최후 진술대로였을까. 아니면 “대통령 자리를 노린 범행”이라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발표한 수사 내용대로였을까.
10·26 사건의 원인을 뚜렷한 대의명분이나 논리적 인과관계로 해석하는 건 낡아도 너무 낡은 방식에 불과하다. 권력에 물든 이들이 보인 속내에는 추상적인 도리나 본분, 조직의 논리보다는 개인의 사정이나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내쳐진 전임 중정부장의 폭로를 막기 위해 만났다가 자신도 그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을 느끼고, 번번이 후배에게 밀려 소외감마저 느낀 2인자가 정권의 종말을 직감해 중대한 결심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픽션은 증언이나 신군부 독재자의 수사 결과보다 더 무게가 실린다. 영화는 대통령 암살사건의 배경을 인물 사이의 감정, 관계의 파열과 균열로 잡아 이야기를 풀어냈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화가 기반이지만 가공을 거쳤다. 방아쇠를 당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규평(이병헌), 차지철 경호실장은 곽상천(이희준), 6년 8개월 동안이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박용각(곽도원)으로 실명 대신 가명을 썼다. 선후배 관계였던 김형욱과 김재규는 친구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은 다양한 가설 중 하나인 파리 유인 암살 후 양계장 시신 유기로 그렸다. 허구의 인물로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아고’라는 비밀 코드도 사용했다. 이아고는 질투와 배신을 주제로 한 셰익스피어 작품 <오셀로>의 등장인물을 도구로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남산의 부장들>은 113분짜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견고하다. 서사는 짜임새 있고, 전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또 이 과정에서 각 인물의 심리 변화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춰 몰입도를 높여준다. 배우의 호연도 볼만하다. 이병헌은 절제된 눈빛과 표정으로 평정심을 잃어가는 권력자의 심리 변화를 잘 나타낸다. 곽도원, 이희준의 연기도 뛰어나다. 외모가 닮지 않았음에도 표정과 걸음걸이까지 박 전 대통령처럼 보이는 이성민의 연기는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특히 2인자들의 충성 경쟁 속에서 점차 히스테릭해지는 독재자의 면모를 실감 나게 그려낸다.
1970년대를 정교하게 고증한 풍경도 힘을 보탠다. 김재규가 죽는 순간까지 두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복숭아씨로 만든 염주도 꼼꼼히 그려냈고, 집무실 한쪽 벽을 채운 근대풍의 1인자 초상화라든가 ‘대한뉴스’에서 빠져나온 듯한 담배‧안경 등 소품도 몰입감을 더한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영화화에 따른 각색을 역사 왜곡으로 주장하는 목소리 때문이다. 김재규는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영화 속 김규평은 쿠데타의 동지였던 박정희가 권력에 취해 망가지는 데 실망해 거사를 치른다는 게 실제 역사와 다르다는 게 핵심이다. 역사 왜곡을 통해 박정희를 죽어 마땅한 인물로 그려 김재규를 영웅화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영화 말미에 담긴 김재규의 증언은 논란을 부추긴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지만 그것만으로 김재규의 저격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영화는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중앙정보부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거사를 도모하게 되는지, 2인자들의 충성 경쟁 속에서 권력에 도취된 박정희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충성을 바치다 버림받은 전임 중앙정보부장이 왜 폭로에 나서게 됐는지 등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렸다. 다만, 영화가 선택한 객관성은 영화적 측면에서 밀도를 조금 떨어뜨린다. 영화에서도, 실제로도 박용각(김형욱)은 미국에서 증언할 당시 “국민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미국으로 빼돌린 2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 문제와 충성에 대한 배신감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원작에서는 김재규의 저격의 원인이 박근혜-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보고한 김재규가 오히려 박정희에게서 타박을 받아 모멸감이 들었다는 것을 들지만 영화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생긴 균열이 저격의 단초가 되지 않았느냐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는 부마 항쟁을 힘으로 찍어누른 박정희 정권의 입장과 크게 다른 중정의 보고서에서 나온 것이다. 김종필은 차지철과 충성경쟁에서 밀린 김재규가 홧김에 거사를 저질렀다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10·26 발발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영화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현상과 사안의 겉모습 뒤에 가려져 있는 본질과 연유에 대해 나름의 가설을 타당하게 보여준 것이다. 김규평을 로마를 구원하기 위해 시저(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로 볼 지, 김재규를 대통령 자리를 노린 배신자로 볼지는 개개인의 역사관과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엔터테이닝 요소가 강한 영화의 일부 각색을 역사 왜곡으로 탓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점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맴도는 김소진의 대사다. “세상이 바뀌겠어? 이름만 바뀌지” 유신독재 종말 이후 권력을 거머쥔 신군부 독재자의 반성하지 않는 말로가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