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 ‘미안해요, 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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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에 나오는 대사다. 열심히 일해도, 성실히 회사를 다녀도, 왜 이렇게 살기 어려운 걸까.

주인공 리키 터너(크리스 히친)는 프랜차이즈 택배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택배회사 매니저는 “리키가 택배회사에 고용된 것이 아니라 합류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고용 계약을 맺지 않았으니, 직원이 아니라 자영업자다. 임금 대신 배송 실적만큼 배송 수수료를 받는다.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지만 리키를 보호해주는 장치 역시 없다는 것을 뜻한다.

리키는 6개월만 버티면 빚도 갚고 내 집 마련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택배 차량은 1만 4천 파운드(한화 약 2,100만 원)다. 회사 차량을 빌리면 하루 65파운드씩 내야 한다. 사정이 있어 하루를 쉬게 되면 대리기사 고용비를 부담해야 한다.

결국 리키는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의 차를 팔아 새 차 구입에 필요한 보증금을 마련한다. 매달 빠져나가는 할부금을 갚기 위해 리키는 쉬는 날 없이 하루 14시간, 주 6일 동안 일한다. 2분 이상 운전석을 비우면 PDA(개인정보단말기)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어 페트병을 짐칸에 싣고 다닌다.

아내 애비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직업 간병인인 애비는 건당 돈을 받는 0시간 계약 노동자다. 오전 7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 일한다. 끼니는 거르기 일쑤고, 주말 저녁 가족들과 식사하던 도중에도 일하러 가기도 한다. 요양업체가 짜놓은 빡빡한 일정 탓에 공감과 존엄을 상징하는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기는 버겁다.

부모의 빈자리는 크다. 가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택한 일이지만, 부모가 과로에 시달리는 동안 어린 자식들은 방치되고 멀어져간다. 부모가 돌보지 못한 두 아이는 우유와 시리얼로 끼니를 스스로 해결한다. 애비는 늘 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의 휴대전화 음성사서함에 냉장고에 있는 파스타를 데워먹으라고 일러둔다. 큰아들 셉(리스 스톤)은 달라진 집안 분위기에 방황한다. 툭하면 학교를 빠지고 친구들과 함께 건물 벽에 그라피티를 한다. 라이자는 리키의 택배일에 따라나서야 겨우 아빠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영화에서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던 부녀가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유일한 장면이다.

리키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과 가족의 휴식을 위해 내려는 휴가는 거절당한다. 애플, 아마존, 삼성, 자라 제품의 지속적 배송 계약을 따내려고 실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관리자에게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래서 리키는 공장 부품이라도 된 듯 열심히 일하는데 빚은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삶을 이어간다. 자식들까지 완전한 빈민층으로 전락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여타 영화와는 다르다. 소위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도, 스릴도, 서스펜스도, 스펙터클도, 반전도 없다. 전개는 쉽고, 은유나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연출한다. 배우들도 연기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한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한다. 그렇지만 켄 감독의 영화에서 연기력을 운운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켄 감독은 배우를 캐스팅할 때 연기 경험보단 영화 속 캐릭터에 가까운 삶의 경험을 더 중시한다. 배우들은 시민의 일상을 그대로, 어떤 꾸밈도 없이 연기 아닌 연기를 한다. 탄탄한 각본과 연출도 큰 몫을 한다. 영화는 힘겹고 과중한 경제적 압박이 어떻게 가족과 인간관계를 파탄 낼 수 있는지를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켄 감독은 해답을 제시하거나, 따뜻한 결말로 포장하지 않는다.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의 현실이지만, 낯설지 않다. 한국에도 최근 플랫폼 노동과 프랜차이즈를 접목해 ‘혁신’의 이름을 내건 플랫폼 프랜차이즈가 많다. 리키처럼 권리는 전무하고 의무만 짊어진 플랫폼 노동자들이 많다. 애비처럼 일한 시간 만큼만 임금을 받는 ‘0시간 계약’을 맺은 임시직 노동자도 많다. 셉과 라이자처럼 과로에 시달리는 부모 밑에서 방치되면서 자라나는 아이들도 많다.

영화 원제 ‘Sorry We Missed You’는 ‘죄송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란 뜻이다. 원래 택배 수신자가 부재중일 때 남기는 쪽지 속 문구지만, 자본주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우리가 놓쳐버린, 미안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