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영화는 한국 영화계에서 극한 흥행의 기준선이다. 꼭 천만 관객을 동원하지 못해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제작비 대비 관객 수만 돌파하면 흥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규모의 경제가 작동해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관객 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브라질도 관객 동원수를 집계하지만 수입액을 우선시한다. 관객 동원수와 흥행수입은 정비례하지만, 각종 할인과 무료입장권, 시사회, 1+1 영화표 등이 얽혀, 누적 관객 수가 같아도 흥행 수입까지 동일하지는 않다. 흥행수입과 관객 동원수를 병행 집계하는 국가도 있다.
한국은 1990년대까지 서울을 기준으로 흥행을 가늠하다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갖춰지고 나서 전국의 흥행성적을 조회할 수 있게 됐다. 2014년부터 흥행 수입을 지표로 산출한다고 했으나, 2018년 이후 관객 수로 박스오피스 순위를 매기고 있다. 한국에서 누적 관객 수를 흥행의 기준선으로 삼는 이유는 영화관 방문에 유리하게 짜인 홍보 전략 때문이다.
천만영화의 상징성은 2000년대 들어 도입된 멀티플렉스 극장과 연관이 깊다. 멀티플렉스 극장은 여러 개의 상영관을 보유하고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복합영화관을 말한다. 한 영화를 몇 개월에 걸쳐 상영하는 극장과 달리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려면 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찾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고, 긴 상영 시간으로 1일 회차가 적어 관객이 원하는 시간에 영화를 볼 수 없었던 불편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스크린 독과점 현상이 심해졌고, 투자 배급의 장벽은 매우 높아졌다. 또 제작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짙어지면서 영화산업의 경쟁구조가 무너졌다. 투자와 배급, 극장 상영까지 가능한 멀티플렉스 극장 환경에서 소수 대기업이 수직계열화로 영화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탓이다. 영화산업진흥위원회에 따르면 2017년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의 전국 스크린 수는 약 2,500여 개로 전체 2,700개 스크린의 92%를 차지하고 있다.
독점적인 배급과 상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영화산업 환경과 기형적으로 발전한 멀티플렉스 환경은 오로지 이익 증대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철만 되면 멀티플렉스 극장을 보유한 대기업 계열사들은 흥행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텐트폴 영화들을 제작 혹은 투자, 배급, 상영까지 한다. 텐트폴은 각 영화 스튜디오(텐트)에서 내놓는 지지대 역할을 해줄 대작 영화(기둥)를 말한다. 원래 제작비가 많이 드는 블록버스터에서 유래됐으나, 요즘은 대중의 시선을 끌도록 유명 영화감독, 배우를 기용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무장한 영화를 말하기도 한다.
각본과 연출이 형편없어도 배급사는 많은 자본을 들여 영화에 투자한다. 그러면 제작사는 관객들이 믿고 보는 배우를 섭외하고, 시각 특수효과(VFX·Visual Effects)를 선보인다. 이어 성수기에 개봉일을 잡아 단시간에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고, 흥행 수입을 최대한 많이 이끌어낸다. 이 때문에 천만 관객 동원은 한국 영화의 발전보다는 일부 대기업의 극한 수익 창출에 적합하다.
올해 총 5편의 천만영화가 탄생했다. 한 해 동안 천만영화 5편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작은 <극한직업(1,393만 명)>, <기생충(1,008만 명)> 2개이며, 외화는 <어벤져스:엔드게임(1,393만 명)>, <알라딘(1,255만 명)>, <겨울왕국2(1,302만 명)> 3개다. <엑시트(942만 명)>는 극한 흥행을 이뤄냈지만 천만영화 명단에 들지는 못했다.
천만영화 5편 중에서 한국 영화 2편은 CJ엔터테인먼트가, 외화는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가 배급을 맡았다. 그런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가 배급한 3편의 천만영화는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 직면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제작, 배급, 상영한 한국 영화에도 상영관을 독식한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스크린 독과점의 비판은 외화에 유독 거셌다.
영화 다양성 확보와 독과점 해소를 위한 영화인 대책위원회는 지난 11월 <겨울왕국2>의 스크린 독과점 사태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단체는 특정 영화의 상영관 독식을 문제 삼으며 법과 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블랙머니>의 정지영 감독은 불공정한 시장을 법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왜 외화가 개봉할 때만 스크린 독과점을 문제 삼느냐’는 지적에 “동료 영화인들이 오랜만에 작품을 선보여 돈을 잘 벌고 있는데, 그들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영화 다양성 증진을 내세운 스크린 독과점 해소 촉구의 취지와 반대되는 말이다.
또 정 감독의 차기작 <고발>은 CJ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 배급한다. 스크린 독과점과 대기업 수직계열화를 줄곧 반대해온 정 감독의 모순적 면모다. 이에 대해 정 감독은 “비즈니스는 비즈니스고,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인들이 2006년 12월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상영제) 축소 법안 국무회의 의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많은 관객이 찾는 영화 상영을 늘린 게 잘못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지속되는 경제침체에 국내작과 외화를 같은 잣대로 묶어야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스크린 독과점에 시장 성장이란 경제 논리와 한국인의 자국 영화 사랑이 덧씌워지면 영화의 다양성 증진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한국 영화 발전도 무색해진다.
역대 천만영화 총 27편 중 한국 영화는 19편이다. 이 중 국내 영화판이 아닌 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괴물>과 <기생충>,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정도다. 나머지 영화들은 국내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 그런데 국제영화제 중 최고 권위를 누리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수상한 한국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2000년)>, <취화선(2002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4년)>, <박쥐(2009년)>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년)>, 이창동 감독의 <시(201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등 7편이 전부다.
기형적인 국내 영화산업 구조에서 상영관을 독식하는 기존의 한국 영화는 질적 성장을 멈췄다. 반면에 신인 감독들이 연출한 독립·예술영화, 상업 영화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 호평받으며 선전했다. 특히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국내외 유수 영화제를 통틀어 무려 35관왕을 차지했다. <우리들>로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한 윤가은 감독의 신작 <우리집>도, 단편영화를 통해 뚜렷한 연출 스타일을 내보인 이옥섭 감독의 <메기>도 저력을 입증했다. 흥행 외화의 개봉일과 겹치지 않아도 한국의 텐트폴 영화들 사이에 치여 적은 상영관 수를 할당받거나 관객이 몰리지 않는 시간대를 배정받은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의 약진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독립·예술영화, 저예산 영화가 상업영화보다 더 고상하다거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상업영화도 예술적 가치가 다양성 영화 이상 있을 수 있다. 다만 경제적 관점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들 때문에 소비자의 선택권이 침해되고 다양성 파괴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
소수의 큰 영화가 스크린을 쓸어 담으면 애써 만든 다른 영화는 관객을 만날 기회를 박탈당한다. 외화나 국내영화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영화가 손해를 보고 일부 영화의 극한 흥행을 통해 그 손해를 보전하는 기형적인 방식이 영화산업에 고착화됐다. 정부가 관여하는 일률적 규제가 얼마나 효과를 볼지 회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