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과 애틋한 첫사랑의 추억. 만들어진 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대표적인 멜로영화로 꼽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배우 김희애가 주연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 <윤희에게>는 1995년 <러브레터>와 포개진다. 24년 전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느낌이 든다.
<러브레터>에서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분)는 등반 사고로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가시와바라 다카시)의 기일에 그의 집에서 졸업앨범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그의 옛 주소를 팔뚝에 옮겨 적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그 주소로 돌아오지 않을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윤희에게>에서도 <러브레터>에서 쓰인 편지, 도서 대출 카드 같은 고색창연한 수단이 사용된다. 남편(유재명)과 이혼하고 고등학생 딸 새봄(김소혜)과 살아가는 윤희(김희애)는 20년 전 가슴에 묻고 산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의 편지를 받는다. 엄마 몰래 먼저 편지를 뜯어본 새봄은 편지 내용을 감춘 채 발신지인 일본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윤희에게>는 <러브레터>와 닮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인물들이 옛사랑의 흔적을 쫓는다는 설정이나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구도 때문이다. 배경이 일본 북해도의 설경이라는 점도 같다. 하지만 <윤희에게>는 <러브레터>의 골격만 빌려왔을 뿐 전개는 다르다. <러브레터>는 회화와도 같은 영상에 첫사랑 같은 아련한 서정을 입혔다. 파스텔톤의 예쁜 화면으로 사랑을 채색한다.
<윤희에게>는 영상미보다는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차별이 완고했던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다. 대학 진학의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시대가 원하는 여성으로 살아온 윤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생은 “벌(罰)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이성애 중심의 일본 사회에서 쥰 역시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며 살아간다. 쥰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 료코(타키우치 쿠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라며, 료코의 마음을 애써 거절한다.
<윤희에게>는 <러브레터>처럼 과거를 회상하면서 옛사랑을 추억하는 멜로영화가 아니다. 흔한 회상신도 없고, 과거를 쉽게 말하지 않고 선뜻 보여주지 않는다. 윤희와 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지레짐작할 뿐이다. <러브레터>는 클라이맥스에 들어서서 히로코가 약혼자가 숨진 산봉우리를 향해 애절한 절규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윤희에게>는 윤희와 쥰이 그토록 보고파 했으면서도 정작 재회할 때는 눈만 마주치고 한없이 걷기만 한다. 마음속에 꼭꼭 숨어 쉽사리 감정을 내비치지 않아야 하는 시절을 보내야 해서일까. 영화 끝에 가서야 윤희는 겨우 입을 뗀다. 부모에게 성 정체성을 들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사연을 설명한다. 퇴근 후 길가에서 눈치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윤희의 모습에서 지난 시간의 지독한 외로움을 읽을 수 있다.
영화는 지난 여성들의 삶에 대한 분노 대신 치유의 정서를 택했다. 고독을 직시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의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담아냈다. 성취해야 할 주제를 향한 강박 없이 침착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내가는 게 매력적이다. 새봄과 경수가 종종 선사하는 엇박의 유머는 기분 좋게 긴장을 이완시킨다.
애초 영화의 제목은 ‘만월(Moonlit Winter)’이었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임대형 감독은 “영화 속 달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메타포(은유)”라고 말했다.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어가듯 서서히 원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달처럼, 윤희 당신이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의미가 있고,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른다는 뜻도 있다는 뜻에서다. <윤희에게>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고 여백을 곱씹으며 음미한다면 은은하고 아름다운 영화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