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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이 넘은 5층 짜리 아파트. 오래된 ‘맨션’은 직사각형으로 마주보게 지어졌고, 가운데 빈 땅을 주차장으로 썼다. ‘맨션’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낡고 색 바랜 건물 3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맞은편 벽에 걸어둔 사진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흑백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오른다리에 무게를 싣고 한껏 멋을 부리며 서있다. 오른손은 소총 탄환집을 잡은 채 축 늘어뜨렸고, 방탄조끼로 보이는 윗옷을 걸쳐 입었다. 눈썹까지 눌러쓴 철모가 그림자를 만들어 눈을 가렸다. 그탓에 오똑하게 코가 도드라져 보인다.
사진 속 남자는 1968년 3월 낯선 땅을 밟았다. 23살 젊은 나이였다. “저도 가겠습니다” 젊은 그는 호기롭게 자원했다. 그동안 자신에게 씌어져 있던 ‘빨갱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릴 기회일 지도 몰랐다. 수시로 찾아오는 형사들에게 ‘내가 빨갱이 잡으러 월남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빨갱이냐’고 큰소리치고 싶었다. 형사들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이사를 가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찾아왔다.
사진 속 젊은 남자는 이제 일흔을 넘긴 노인이 되었다. “신문사에서 오셨어요?” 6월 5일, 대구 동구 오래된 ‘맨션’ 주차장에서 그를 만났다. 노인은 아래로 처진 눈꼬리가 선해 보였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기엔 너무 해맑은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오른손에 들린 먹다 만 아이스크림이 해맑음을 더했다. “아! 허창수 선생님이세요?” 뚝뚝, 아이스크림이 녹아 방울방울 떨어졌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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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수는 1945년 3월 압록강 넘어 만주에서 태어났다. 원래 집안 선조들은 경남 김해에 모여살았다. 현조부 허돈이 1807년에 경북 구미 임은 마을로 터전을 옮겨왔다. 이야기는 다양하다. 김해에서 낙동강 따라 서울로 무역을 하던 허돈이 어느 날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곳이 임은 마을이라는 설부터, 지나다 들린 임은 마을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터전을 옮겼다는 설까지. 이유가 무엇이든 허돈은 족친 서너가구와 함께 임은 마을에 터전을 잡았고, 새로운 부락을 형성했다.
허돈이 터전을 옮겨온 지 꼭 100년되던 해에 나라에는 큰 일이 있었다. 야금야금 조선을 침탈해오던 일제는 급기야 1907년 7월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켜버렸다. 힘 없는 나라의 황제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성과 없이 수모만 겪었다. 같은 해 8월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켜버리니 조선의 뜻 있는 선비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임은 마을 허돈의 자손들도 앞다퉈 의병 항쟁에 투신했다. 그중 두드러진 인물이 허위였다. 이미 여러차례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는 1907년에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했고, 각도의 창의군들과 연합해 한성으로 진격해갔다. 허위는 한성 동대문 밖 30리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패퇴했다. 결국 그해 5월 일본 헌병의 습격을 받아 체포됐고,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허위의 죽음 이후 임은 마을은 살벌한 분위기가 됐다. 일경과 일경의 명을 받은 조선인들이 곳곳에서 임은 마을 사람들을 감시했다. 마을 곳곳에 빈 집이 늘어났다. 잡혀가거나 달아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임은동 264번지에 살던 허창수의 조부 허필은 잡혀가는 것보다 달아나는 쪽을 선택했다. 허필은 큰집 허위 네에서 뜻을 같이 하는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1915년 음력 3월, 봄 농사 준비가 한창인 무렵, 어둠을 틈탄 탈출이었다.
“1915년 음력 3월, 멀리 들판에는 엎드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계절이었다. 언제 짐을 다 싸 놓았던지 우리는 하늘이 캄캄할 때 집을 나섰다. 성산어른(허위의 셋째형)의 인솔에 따라 우리 가족 전원, 권팔도네 가족, 당숙(허보, 허필의 아들) 가족과 같이···.” 허창수의 육촌 누님, 허은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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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돈의 자손들은 압록강 넘어 서간도에 첫 발을 딛였다. 길림성 통화현 일대에서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은 조금씩 북서쪽으로 이동하다가 유하현 고산자진 대두자촌에 자리잡았다. 1918년이었다. 그해 지독한 북간도 독감이 일족 몇몇의 목숨을 앗아갔다. 허필의 큰아들 허보도 그해 독감으로 죽었다. 22살, 한참 힘 쓸 나이였다. 둘째 형식은 갓 9살이 된 참이고, 허창수의 아버지가 되는 규식은 이제 돌을 넘긴 참이었다. 잘 걷지도 못하는 규식을 제외한 온 가족이 땅을 일구는데 메달렸다. 소 모는 법도 잘 몰랐다. 끼니를 거르며 땅을 일궜다.
어쩌면 조선인에게 만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경작할 땅이 부족했던 조선 북부지방 사람들은 수시로 강을 건넜다. 드넓은 만주에는 주인 없이 버려진 땅이 많았다. 이들은 그곳에 씨를 뿌리거나 약초, 인삼을 캐 돌아오곤 했다. 아침에 국경을 넘어가 농사 짓다가 저녁에 돌아온다고 해서 일귀경작(日歸耕作)한다고 했고, 더나아가서는 봄에 강을 넘어가 농사 짓고 가을에 추수해 돌아온다고 해서 춘경추귀(春耕秋歸)한다고도 했다.
‘말갈’이라고도 하고 ‘여진’이라고도 부르며 깔보던 원주민의 힘이 쎄지면서부터는 강 건너는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됐다. 원주민들은 급기야 나라(청:淸)를 세우곤 억울하게 폐위된 조선왕의 원수를 갚는다며 조선으로 출병해왔다. 조선은 연전연패하다가 1628년 강화도에서 아우됨을 자청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땅으로 조선인이 넘어가는 것도 금지했다. 조선인 뿐 아니라 한(漢)인과 몽고인의 출입을 막으려 만주 전역에 넓게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버드나무 목책을 세웠다. 아우 된 조선왕은 월경죄(越境罪)를 엄히 물었다. 1631년 안덕간과 김태수는 국경을 넘어 삼을 캐다 운 나쁘게 붙잡혔고, 머리가 베어졌다. 만주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땅이 됐다.
금단의 땅은 200여년 만에 굶주림을 못이긴 사람들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졌다. 중국 하북성, 산동성 지방 한인들은 잇따른 전란과 홍수,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 당국은 1867년 공안질서, 조세징수 등을 이유로 이 지역을 한인에게 개방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 북부 지방도 자연재해와 대기근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조선인들도 굶주림을 못 이겨 국경을 넘어갔다. 1870년 전후 서간도 일대로 유입된 조선인은 천여 가구를 넘어섰다.
조선 속담에 ‘굶어 죽어도 벼씨를 베개에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조선인들은 항상 볍씨를 지니고 다닌다는 의미다. 국경을 넘어간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만주에서도 땅을 개간해서 씨를 뿌렸다. 하지만 그 땅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청나라는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북간도 지역 일부에서 조선인 토지 소유를 허용했다. 청나라는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지금의 연변 지역으로 조선인을 이주해 정주토록 유도했다. 1884년에 ‘길조통상장정(吉朝通商章程)’을 체결했고, 훈춘과 화룡곡 지역에 조선인을 위한 개간 지역이 설정됐다.
이 지역 이외에선 조선인 토지 소유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다만, 청나라 사람이 되어 변발을 하고 그들의 복식을 따르면 토지 소유도 가능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체화하고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땅을 얻으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뿐이었다. 1910년 기준으로 북간도 조선인 약 10만 명 중 토지 소유 때문에 나라를 바꾼 사람은 10% 정도로 확인된다.
덕분에 조선인 다수는 열심히 개간한 땅을 만주 원주민이나 한(漢)인에게 빼앗겼고, 소작인으로 살아야 했다. 땅 주인들은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토세(土稅)나 촌락세(村落稅) 따위를 소작인에게 절반 또는 모두를 부담시켰다. 이런 세금이 소작료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었다. 악질적인 땅 주인들은 심지어 제방 수로 건축비나 관개수로 토지 사용료까지 소작인들에게 전가했다.
광복 후 제헌의회 의원을 지낸 이훈구 교수가 1930년경 만주를 둘러본 상황은 이랬다. 이 교수는 북만주 지역 201개 농가를 살폈는데, 농가당 평균납세액이 43.64원이었다. 조선인 1명당 납세액은 8.17원인데, 당시 조선인 1명의 한 해 생활비용이 50.35원인걸 고려하면 약 두 달치 생활비용인 택이다. 좋은 농사 조건을 갖고 있는 농가도 한 해 63.65원을 적자로 봤는데, 특히 201개 농가 중 189개 농가는 평균 30.99원을 부채로 지니고 있었다.
만주 조선인들은 경제적 궁핍과 함께 정치적 곤궁함에도 처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조선의 모든 권한을 빼앗은 후 만주 당국은 조선인을 일제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핍박했다. 조선인을 통해 만주땅이 일제에 넘어가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다. 1925년 일본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만주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은 조선인 단속에 대한 이른바 ‘미쓰야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만주 당국은 조선인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미쓰야 협정’은 일제와 만주 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협정이었다. 일제는 이를 통해 만주 내 경비 비용과 인력을 절약할 심산이었고, 만주 당국은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간섭을 최소화할 목적이었다. 만주 당국은 조선인이 한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학교 폐쇄, 경작지 몰수 뿐 아니라 불법적으로 조선인을 체포하면서 압박했다.
만주 조선인에 대한 만주 당국의 압박은 봉천성에서 시작돼 길림으로 번졌다. 1920년 경신참변과 미쓰야협정 등이 이어지면서 간도 일대는 더 이상 조선인이 숨쉬기 힘든 땅이 되어갔다. 허돈의 자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간도 일대에 자리잡은 이들은 1921년 서간도를 탈출해 만주 깊숙히 들어갔고, 뿔뿔히 흩어졌다. 허위의 아들 허학 등은 흑룡강성 목단강시로 도피했고, 허창수 조부 허필 일가는 요녕성을 거쳐 흑룡강성 하얼빈시 빈현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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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돈의 자손들은 그와중에도 항일 항쟁을 이어갔다. 어쩌면 영광스러울 항쟁의 기억이 허창수에겐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파편적인 이야기만 아는 수준이다. 어머니도 남자들의 바깥 일을 구체적으로 알진 못했다. 홀로 어린 남매를 건사한 어머니가 과거의 영광에 목매기엔 현실은 너무 갹팍했다. 조부, 숙부 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남자 어른들은 허창수가 태어나기 전에 죽거나 그가 너무 어렸을 때 죽었다.
아버지 형제들은 다른 사촌 형제들에 비해 어렸다. 아버지 허규식이 1916년생이고, 숙부 허형식은 1909년, 백부 허보는 1897년에 태어났다. 사촌 형제인 허발이 1872년생이고, 큰집 택인 허위의 큰아들 허학이 1887년생인 것에 비하면 적게는 10년 많게는 40년 넘게 차이가 난다. 나이 차는 단순히 형-아우 관계를 나눈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험의 차이도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서 태어나거나 만주에서 성장기를 보낸 허규식과 허형식의 경험은 조선의 양반가에서 나고 성장기를 보낸 사촌 형제들과 달랐다. 이들은 만주 조선인의 궁핍함과 곤궁함을 함께 겪으며 성장했다. 그 위에 민족적 모순이 더해졌다.
당연히 항일항쟁에 나서는 시기도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는데, 허형식이 본격적인 항쟁에 나선 것은 1930년대다. 이 무렵 만주 조선인 사회에서는 만주 당국의 조선인 탄압에 대응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1927년 길림에서는 정의부 중심으로 한교구축문제대책강구회가 조직됐고, 1928년 1월에는 봉천에서 ‘만주한(韓)인대회’가 개최됐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도 조선인의 편에서 당국과 맞섰다. 중공당 만주성위는 만주통신을 통해 불법적이고 무자비한 만주 당국의 조선인 압박을 비판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무한한 비통과 최대 최후의 원조를 표시했다.
중공당은 조선인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곤궁에 집중했다. 이들은 조선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반일투쟁과 반봉건투쟁을 결합한 여러 민족의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만주통신 1928년 4월 15일자에 발표한 ‘만주 조선 농민에게 알리는 중공 만주성 임시위원회의 글’에는 “지주계급과 반동적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자”거나 “(여러 민족이) 연합하여 공동의 원수인 제국주의와 국민당을 향해 진공하자”는 혁명적 독려가 포함됐다.
1921년 길림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이 조사 발표한 걸 보면 조선 가정 2,068호 중 2,032호가 농업에 종사했다. 간도일본총영사관이나 안동일본영사관도 조선인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만주에 사는 조선인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셈이다. 더구나 이들 중 대다수는 소작농이었다. 지주계급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은 이들에게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고, 당시 조선인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아갔다.
“지금 북간도 지역을 제외한 북만주와 남만주 지역은 한국인이 땅을 법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어요. 만주로 이주한 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은 자기땅을 가지지 못한 소작농이었죠.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가지고 농사를 짓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점에서 생활 조건이 굉장히 어려웠고, 대부분 소작농으로 살아가면서 중국인 지주, 때로는 한국인 지주와 갈등이 많았다.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서 ‘소작인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켜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당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호소를 하면서 한국인들이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하고 공산당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됐죠”
오랫동안 만주 항일항쟁을 연구한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장세윤의 설명이다. 그는 만주에서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중국보다 조선에 의해 주도됐다고 본다. 중공당이 조선인 소작 농민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도 공산주의 운동에서 조선인이 갖는 역량이 컸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 만주임시성위원회는 1927년 10월에 결성되는데, 그보다 앞선 1923년 9월에 조선인 박윤서, 주청송 등이 연길현 동흥중학교를 중심으로 고려공산청년동맹 지부를 조직해 활동한 기록 등이 이를 방증한다.
당시 많은 조선인이 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허창수의 아버지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1921년 서간도를 떠나 정착한 흑룡강성 하얼빈 일대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고, 수리시설도 풍부했다. 하지만 개간한 농토는 소수의 지주가 집중 소유했고, 대다수 농민은 소작농이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나 중공당 북만특위는 열악한 처지에 있는 농민들을 포섭했다. 숙부 허형식도 이곳으로 이주해온 지 얼마지나지 않아 최용건 같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만났다. 숙부는 자연스럽게 공산당원이 되었고, 항일 혁명투사로 거듭나게 된다. (계속)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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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도움
박도 소설가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허영길 연변박물관 연구원
허창수 허형식의 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