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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출생지는 달성군 수성면(지금의 대구시 수성구)이다. 이여성의 부친 이경옥은 창원 현감(조부 이선형은 금부도사)을 지낸 부호로, 대구와 경북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다. 이경옥의 본적은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39번지인데, 제적등본 상 1917년 2월 20일 달성군 수성면 지산동 498번지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사한 즉시 실거주지 신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여성이 출생한 1901년에는 이경옥이 살았던 지산동에서 함께 살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한편 칠곡군 신리가 이여성의 출생지라고 여기는 연구자나, 대구 계산동 일대가 출생지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다만 출생지가 어디든 신리 웃갓마을 자택 부지에 학당이 있었으므로, 이여성은 어린 시절 주로 칠곡을 중심으로 계산동, 지산동을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는 이여성이 1909년에 상경해 보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성장한 지역이면서, 1919년 3·1운동 발발 후에는 혜성단에 소속해 활동한 무대이기도 했다. 대지주·양반층이 비교적 두껍지 않아, 엘리트 계층이 비교적 일제에 포섭되지 않은 곳이다. 이경옥의 집이 있던 곳 중 하나인 계산동은 개신교 중심지로 한발 앞서 개화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었다. 이여성 일가는 계몽사상은 물론, 신리 땅에 예배당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기독교도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풍족한 재산, 개화된 가정은 이여성이 원하는 학업과 활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웃갓마을 주민 강성희(92) 씨와 이한용 씨에 따르면, 칠곡 자택의 땅은 5천여 평에 이른다. 여기에는 예배당, 정자, 학교와 운동장도 있었다. 현재는 생가터는 물론, 담장조차 남아있는 것이 없다. 대부분 농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 토지에는 철도가 생겼다. 풍족한 집안을 기반으로 이여성은 일생동안 만주, 일본, 상해, 서울, 평양을 활동 무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3.1운동 후 대구에서 혜성단 활동을 할 때 집안의 땅문서를 팔아 자금을 댄 것도 이여성이었다.
이여성, ‘민족’과 만나다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에 나서다
3·1운동 일어나자 귀국해 혜성단 활동, 투옥까지
이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민족’이다. 훗날 일본 유학 시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민족주의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되는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시절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한반도를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민족주의는 기본적인 의식이었다. 이여성의 최초 민족주의적 행보로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선 것을 꼽을 수 있다. 역도, 테니스 등 스포츠를 즐기고 소질도 있었던 그의 성격과도 잘 어울린다.
이여성이 보성학교 4학년이던 1917년, 일본인 교사 배척 운동이 있었다. 당시 학생 시계 분실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학생 신체검사를 했는데, 4학년 학생의 주도로 경찰을 학교에 불러들인 사태 규탄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 개입 배후에 일본인과도 연관이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 일본인 교사 배척 운동으로 발전해 2, 3, 4학년이 동맹휴학을 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여성은 이 사건을 주도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퇴학원을 제출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 사건을 민족주의 운동의 시초로 보기도 하지만, 최재성 교수(성균관대)는 처음부터 민족적 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학내에 경찰이 들이닥친 상황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한다.
이여성은 1918년 3월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 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다. 약산·약수와 인연은 약산의 고모부 황상규(黃尙奎, 1890~1931)가 이들 셋을 의형제로 맺어주며 시작됐다. 1918년 약산은 중국 톈진에서 유학하던 중 일시 귀국한 상황이었고, 약수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상황이었다. 약산과 약수라는 이름은 황상규가 지었다. 이때 이명건(李明建)은 별과 같다는 의미의 여성(如聖)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평생 ‘이여성’으로 살았다. 약산, 약수, 여성은 서로 다른 사상으로 진정한 민족 해방이라는 과제를 향해 나갔다.
이럭저럭 심한 객고를 약 6개월 격고 잇는데···길림으로 향하엇다. 그곳에 가서 둔전병계획을 실행하고저 함이엇다. 둔전병이라 함은 평시에는 집단적으로 부락을 이루어 농경을 하여 생활의 안전을 엇다가 일단 유사할 때에 이러나도록 그에 필요한 무예 등을 습득케 하는 일이엇다···이 일에는 만흔 자금이 든다. 그것은 R군의 힘을 기대하기로 되엇다. 아무튼 나는 이 일을 성공식히기 위하야 요노인들과 맛나불 필요상 천진에도 두어번 단녀오고 북경, 상해, 남경 등지로도 여러번 왕래하엇다···이리하는 사이에 세계대전 종결의 뒤를 이어서 안에서는 긔미운동이 이러낫다. 밧갓흐로 날려드는 여러 가지 정보에 외지에 잇슬 때 아님을 깨다른 R군과 나는 意見를 달니하는 K군을 국외에 둔 채로 조선 안에 드러왓다 (김약수 저, 나의 해외 망명시대 중 발췌)
약수의 글에 언급된 ‘R군’이 이여성이다. 이들은 이때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의 일환인 둔전병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당시 세 사람 모두 사회주의 사상은 접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상적 기반이 있다기보다 활동 지향적인 이들의 성품 때문으로 보인다. 약수는 “더군다나 합병된 이래 조선청년 사이에는 문약(文弱, 글만 받들고 실천은 하지 않아 나약함)의 가통(可痛, 통탄)할 풍조가 흘너서 도모지 사면을 바라보아야 굿굿한 상무적(尙武的, 무예를 지향하는) 기개라고는 차즐 수 업섯슴으로 이를 분개하는 나마에 내 한 몸이라도 반드시 군인이 되지 안으면 안 되겟다고 각오 하엿든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일제 경찰은 당시 이여성이 마련한 돈이 4만5천 원이라고 했다. 이는 이여성이 부친 이경옥 소유의 토지를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이경옥 몰래 팔았는지 묵인 하에 팔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둔전병제 계획을 준비했으나,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다. 3·1운동은 이 셋의 독립운동의 분기점이 됐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방법론으로 무장투쟁론을 선택했고, 약수와 이여성은 3·1운동 정세 속에서 대중투쟁론을 선택했다. 이여성과 약수는 곧바로 귀국했다. 이여성은 대구에서 3·1운동의 일환으로 혜성단 활동을 시작했고, 약수는 서울에서 노동공제회 활동에 나섰다. 약산은 길림으로 가서 의열단을 창설했다.
혜성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밀조직으로, 이여성은 혜성단 활동을 통해 그의 대중투쟁론을 실천했다. 혜성단은 3·1운동 이후 대구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상인들의 폐점 철시 유도,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암살 협박문 발송, 노동자 파업 등에 나섰다. 이여성은 혜성단에서 연락책이었다. 혜성단은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도 연대를 꾀했으나, 일본 군경의 감시망에 걸려 주요 활동가들이 검거됐다. (관련 기사=대구 곳곳 3·1운동 재현···100년 전 대구는 ‘3·8만세운동’) 이여성은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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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공화국존재는 조선독립달성을 방해”, 동아일보, 194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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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의 혐의”, 동아일보, 1947.8.14
“유명인 죽음 마케팅 ‘사의찬미’ 대성공 두려웠던 日이 발표한 노래는?”, 김문성 국악평론가, 동아일보, 2018.2.8
#도움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최재성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이중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김윤오 칠곡문화원장
이한용 느티나무 헌책방(바우북) 대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강성희 칠곡군 신리 웃갓마을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