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조국이 쏘아 올린 작은 공 / 이기쁨

13:42

지난 9월 2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유례없는 ‘무제한’ 기자간담회가 11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예상대로 기자간담회에서는 조 후보자 일가 사모펀드 투자 관련 의혹과 딸의 입시 관련 의혹에 관한 질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딸의 입시 관련 의혹에 관한 질의응답 중에 조 후보자는 “저는 통상적 기준으로 ‘금수저’가 맞다. 세상에서 저를 ‘강남좌파’라 부르는 것도 맞다”며 “아무리 고민했고 공부했더라도 실제 흙수저 청년들의 마음과 고통은 10분의 1도 모를 것이다. 저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저희 아이와 비슷한 나이인 김용균 씨는 산업재해로 비극을 맞이했다. 저희 아이가 얼마나 혜택받은 사람이겠는가 모를 리 있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 후보자는 정말 그와 그의 가족이 받은 ‘혜택’을 자각하고 있었을까?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진=오마이뉴스]

나는 자각하지 못했다. 조 후보자의 딸과 직접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나는 인문계고를 졸업하고는 ‘당연히’ 대학에 갔고,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강의를 들었고, 큰 빚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 내 주위의 친구들은 대개 비슷한 형편이었기에, 그것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줄로만 알았다.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은유 작가의 말처럼, 어떤 이유에서인지 ‘혜택받지 못한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많은 이들이 혜택을 누려왔지만, 그것이 혜택인지 모르고 살아왔을 수 있다. 보이지 않았기에 김용균과 같은 청년들에게 무관심했을 수 있다. 합법적으로 입시제도를 활용하고 열심히 ‘노력’해 그 보답으로 좋은 대학에 갔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나’들이 모여 수저계급론이 그저 유머로 소비되는 사회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런 ‘나’들의 착각이 불평등한 구조에 분노하는 것을 미뤄뒀다. 그렇다면 ‘무지’는 변명의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무지의 ‘죄’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조 후보자가 불평등 사회의 면면을 부각해 준 김에, ‘혜택받지 못한 사람’을 가시화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주해야 한다. 마침 지난 8월 31일, 청년 노동자 공동체 ‘청년 전태일’은 ‘조국 후보 딸과 나의 출발선은 같은가’를 주제로 공개 대담회를 열었다. 이 대담회에서 한 노동자는 “대학이 사치이고, 건강검진 받는 게 그림의 떡인 청년들의 아픔에 조 후보자가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많은 청년 노동자(주로 비정규직·고졸·지방대생)들이 단순히 ‘산업재해라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노동한다. 이러한 노동의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연 대담회의 중심에는, ‘조 후보자가 사퇴(혹은 임명) 되면 청년들의 현실은 바뀌는가?’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청년’이란 이름으로 함께 묶이는 이들은, 이 질문에 주목하고 힘을 실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청년’으로 묶이는 대학생 집단은 이들에게 여전히 무심하다. 청년 전태일이 주창하는 ‘청년’의 범주 속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들과 나의 삶은 뭔가 다르다 착각하기 때문이리라. 최근 서울 상위권 대학에서 열리는 집회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대한 지적보다 조 후보자의 사퇴만을 촉구하는 것이 그를 방증한다. 그러나 조 후보자가 사퇴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둔 사회에 몸을 끼워 맞춰 그들의 논리에 맞출 필요는 없다. ‘경쟁의 공정성’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조 후보자로 인해 드러난 기성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하는 것에 골몰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맞닥뜨린 질 낮은 일자리, N포세대라는 멸칭, 부의 대물림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일 것이다. 변화를 열망한다면, 불평등한 구조가 불러온 폐해를 마주하고, 분노해야 한다.

결국 ‘내 삶’을 바꾸기 위해서 청년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청년들이 이번 사태에 무관심하다면, 어떤 언론도, 어떠한 정치인도 ‘내 삶’을 대신 바꿔주지 않는다. 조 후보자가 쏘아 올린 ‘불평등’이란 의제 앞에서 청년이 연대해야 하는 이유다. 불평등이 개인의 능력과 관련된 문제로 귀결되지 않고, ‘합법적’인 특권으로 똘똘 뭉쳐진 ‘그들만의 카르텔’을 무너뜨릴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특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니 말이다. ‘평범한 사람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단 말은 지금의 불평등을 덮어두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공허한 선언 대신,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임금 격차가 크지 않고, ‘잘 살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부모의 부가 아이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실질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대안이 제시되도록 촉구하는 것이 지금 청년들의 역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