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불꽃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하,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설임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
.
.』
이 시는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이라는 장편 시의 첫 부분이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도피하며 청계천을 누비던 1977년 가을에 쓴 시다.?불멸의 불꽃 전태일을 온전히 세상에 드러낸 조영래는 우리 지성사에서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전태일 분신 사망 이후에 조영래는 그를 찾아갔다. 이 ‘영혼의 만남’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
올해는 전태일 사망 45주년이다. 11월 13일은 그의 기일이다. 이에 맞추어 우리는 또다시 전태일을 불러 보자.
전태일을 불러옴
전태일이 있었다. 45년 전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무지렁이였던 이 젊은이는 암흑을 깨트리는 횃불처럼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리고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장엄한 사자후를 유언으로 남겼다.
시카고대학 사학과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현대사’에 이렇게 썼다.
『1970년에 한 노동자의 고독한 행동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섬유노동자인 전태일이 11월 13일 서울의 평화시장에서 분신했고, 불꽃이 그를 불사르는 순간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하고 외쳤다. 7년 전 사이공 시내에서 한 승려의 분신이 지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과 유사하게, 이 분신자살은 전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는 ‘철학의 헌정’ 서문에서 ‘전태일 분신’의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다.
『전태일은 슬픔의 예수와 분노의 예수, 눈물의 예수와 빛의 예수를 자기 속에 하나로 구현한 영혼이었다. 대구 남산에서 태어나 서울 평화 시장에서 만난 전라도 소녀들에게 차비를 아껴 붕어빵을 사 주다가 불꽃으로 산화한 그는 스스로 빛이 된 눈물이다. 어느 누구의 삶도 눈물과 불꽃이 어떻게 하나인지를 전태일의 삶처럼 그렇게 처절하게 보여 주지는 못 할 것이다.』
불의 바다에 핀 연꽃(Lotus in a Sea of Fire)
김상봉 교수는 지배 권력의 폭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는 양상을 3가지로 보았다.
1. 비폭력 저항이다. 3.1운동이 대표적이다.
2. 무장폭력 저항이다. 지도부가 확고한 이념을 가질 때 따르는 자들이 거대한 무리를 짓는다. 지도자가 정당한 의식을 가졌기에 따르는 무리들은 무기를 들고서도 도덕적 지향을 잃지 않는다. 이 저항이 우리 근대사에서 찬란한 빛이었던 갑오동학혁명이었다. 비루한 집권자들은 외세의 폭력을 끌어들여 동학혁명을 진압했다.
3. 특이한 양상의 저항이 하나 있다. 저항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외쳐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칠 때다. 이럴 때는 폭력이 자신에게 향한다.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전태일 열사 분신’이 대표적이다.
전태일 분신 7년 전에 베트남 승려의 분신이 있었다. 베트남은 1954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100여 년간 식민 지배한 프랑스를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제3세계 국가가 유럽 식민지 본국을 패퇴시킨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열린 제네바 회의에서 베트남은 자유 총선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베트남 역사에 티끌만큼도 관련 없는 미국이 나서 제네바 협의서를 찢어버리고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했다. 그리고 남쪽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나쁜 점을 합친 것보다 훨씬 잔혹한 응오 딘 지엠을 미국 괴뢰 정권의 대통령에 앉혔다.
그러자 베트남 민중의 저항도 거셌다. 당시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시)에는 십수만 정치범이 150여 개의 감옥을 가득 메웠다.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음식에 독약을 풀어 약 4천 명을 학살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들은 1960년에는 자발적인 민족해방전선(미국은 이들을 비하해서 베트콩이라 불렀다)을 결성해 무장 저항의 깃발을 올렸다. 이들의 위세는 금방 괴뢰 정부를 무너뜨릴 정도였다. 황급하게 놀란 미국 케네디 정부는 베트남에 군사개입을 했다.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란 후원을 등에 업은 지엠 정권은 더욱 발악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1963년 6월 16일 사이공 시내서 미국 괴뢰인 지엠 정권의 폭정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불교 고승 틱꽝득이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하였다. 이 분신을 위해 승려들은 상당 기간 은밀하게 준비하였다. 시내 네거리에는 경찰을 막기 위해 수십 명의 승려가 둘러쌌고 외신 기자를 불렀다. 수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틱광득 스님은 놀랍게도 온몸이 숯덩이가 될 때까지 가부좌 튼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서구 언론은 경악했다. 갈릴레이와 함께 지동설을 주장한 중세시대 신학자 브루노 같은 사람을, 또는 KKK단원들이 흑인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통닭구이 만든 경험은 있어도, 그들 역사에서 신념 때문에 스스로 몸을 불태우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이 분신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베트남의 감춰진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이 그토록 꺼려했지만, 이 사건으로 베트남 문제가 비로소 유엔에 상정 됐다.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부처님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치는 행위로 일반적인 분신과 다르다. 또 개인적인 좌절이나 절망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살하고도 다르다.?현재 프랑스에서 국제 참여불교 운동의 지도자로 주목받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틱 낫 한 스님은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은 바로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자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자본주의
우리는 1960년대 한국 자본주의 시장의 본보기인 청계천 평화시장을 둘러보기 전에, 영국의 1800년대 초반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영국의 위대한 작가 찰스 디킨슨이 당시 영국 자본주의의 어둡고 비참한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평화시장의 비참한 사정과 다를 바 없었다. 구조적으로 가난을 양산하는 사회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진 디킨스는 문학 작품으로 사회적인 문제들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그 대표적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1838년 작)’를 들춰 보자.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다. 귀족이 몰락하고 도시의 자본가들이 힘을 갖기 시작했다. 이 이면에는 하루에 한 끼조차 먹기 힘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부터 학교 대신에 공장에 가야 하는 빈민이 존재했다. 아래 글은 소설 일부분의 요약이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구빈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곳은 누구의 간섭이나 보살핌도 받지 않은 채 하루 종일 마루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지내는 곳이었다. 너무 많이 먹어 배가 아플까 염려할 필요도, 옷을 많이 입어 불편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원장은 아이 한 명당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는 돈을 정부에서 받았다. 그러나 원장은 지혜와 경험이 풍부해, 아이에게는 무엇이 좋고 자기에게는 무엇이 좋은지 잘 알았다. 그래서 보조금의 대부분을 빼돌려 자기 몫으로 챙겼고, 아이들에게는 겨우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썼다.
아이들은 빵 반쪽을 먹을 수 있는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작은 그릇에 죽을 딱 한 사발만 받아 먹었다. 그릇은 씻을 필요가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날 때까지 숟가락으로 박박 굵어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간절한 눈길로 솥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배가 고픈지 그 솥마저 집어 삼킬 듯한 눈빛이었다.
어느 날 올리버는 금세 바닥을 보인 그릇을 들고 아이들의 대표로 원장에게 다가갔다.
“원장님, 죽 한 그릇만 더 주세요. 배가 너무 고파요.”
퉁퉁하고 혈색이 좋은 원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리고 나지막이 물었다.
“뭐, 뭐라고?”
“저기…제발 조금만 더 주세요!”
그러자 원장은 소리를 꽥 질러 직원을 불렀다. 직원은 원장에게 상황을 듣고 구빈원 위원회에 뛰어가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신사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림키스 씨. 글쎄, 올리버란 놈이 죽을 더 달라고 했답니다.”
모두가 이런 일이 생전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더 달라고 했다고? 이봐, 침착하게 설명해 보게. 그 애가 규정대로 준 저녁을 다 먹고도 더 달라고 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다른 위원이 끼어들었다.
“이런, 이런! 그놈은 앞으로 교수형을 당할거야, 언젠가는 교수형을 받고 죽어도 싼 놈이라고!”구빈원 위원들은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토론을 벌였다. 다음 날 아침 구빈원 대문에 공고문이 나붙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데려가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돈을 얹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올리버를 어린이 노동 착취하는 장의사에게 넘겼다.』
청계천 평화시장
올리버는 19세기 영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6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에도 수많은 어린 여성 올리버들이 일하는 작업장이 있었다. 대부분 업주는 림키스와 다를 바 없었다.
1965년, 청계천 평화시장에 찢어지게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며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은 어린 촌놈 전태일(1948~1970)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대구에서 찾아왔다.
평화시장 시장은 거대한 닭장 같은 고도 착취 사업장이었다. 소규모 의류제조업자들이 3, 4층의 창고에 약 1.2m 높이로 마루를 깔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에는 모조리 작업대 하나, 재봉틀 한 대, 어린 여자 한 사람을 집어넣었다.
14~16살의 소녀들이 마룻바닥에 끓어 앉아 오전 8시에서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을 일해야 했다. 한 달에 이틀, 첫째 셋째 일요일에만 쉴 수 있었다. 할 일이 많은 때는 철야작업까지 했는데 깨어있기 위해서는 각성제 ‘암페타민’을 먹었다. 하루 임금은 다방 커피 한 잔 값인 50원이었다.
그때 다방은 일상적인 만남을 겸한 묘한 휴게 장소였다. 요즈음 커피숍하고는 전혀 달랐다. 얼굴이 반반한 마담은 젊은 아가씨 몇 명을 고용해 커피를 팔았다. 야릇한 웃음을 띤 중년 남성이 아가씨를 불러 어깨를 밀착하면 아가씨에게 커피를 한 잔 사주어 공순이 하루 임금인 50원 매상을 올려야 했고, 다리에 손을 얹고 농을 주고받을 아가씨라면 계란 노른자를 띄운 뜨거운 쌍화차를 사주어야 했는데 한 잔에 200원 정도 했다.
어린 여공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과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다 못해 직업병인 폐렴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강제 해고당했다. 이를 보다 못한 동료 노동자 전태일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이 안질,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에 고생하고 있으며, 성장기에 한 번 고생하면 평생 고칠 수 없으므로 근로환경을 개선해줄 것을 하소연했다.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말한 노동자는 같이 해고당했다.
해고당한 우직한 청년은 평화시장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던 중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부하였으나 한자가 너무 많아 내용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은 청년은 이때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답답한 청년에게 지식으로 도움을 줄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청년은 법이 규정한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꼈다. 못 배운 젊은이의 분노가 자본주의 남한 사회의 근본 모순을 뿌리째 드러낼 줄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나름대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노동청과 서울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줄기차게 제출하였지만, 번번이 묵살 당했다. 개선 요구 사항은 하루 근무시간을 10~12시간, 일요일마다 휴일, 정확한 건강 검진, 일당을 100원 정도 인상해달라는 소박한 요구였다. 12시간 정도는 뼈 빠지게 일할테니 대신에 다방 아가씨에게 사주는 쌍화차 반값 정도의 일당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22살 청년 전태일은 자신이 조직한 ‘삼동회’의 회원들과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근로기준법을 화형식 하기로 결의하고 평화시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와 경찰의 방해하여 시위가 무산되자, 전태일은 갑자기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렸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를 외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절박한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고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다. 전태일의 장엄한 죽음은 민주화의 밑그림이 되었고 비로소 남한 사회의 자생적 진보가 첫걸음을 디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태일의 분신은 어떤 거대한 담론보다 더 큰 울림이요, 실존을 자각한 사자후였다.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바보’는 잔인한 현실에서 오히려 맑은 눈으로 사회 모순의 근본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잘 사육된 개의 순종적인 눈이 아닌 자유로운 들판에서 자란 늑대의 맑은 눈으로 말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비비 꼬고 빙빙 둘러 말하는 이론가들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고상한 렌즈로 보는 먹물들의 눈에는 직관의 진실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자신도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어린 누이의 더한 고통을 보고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픈’ 측은지심의 발현이 현실 모순에 대한 성찰로 나아갔다.
만약 진보라는 말에 착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면 자신의 몸을 불사른 ‘바보’의 진보보다 더 고귀한 진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진보란 현실 모순을 직시하고 개선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방이나 토굴 또는 수도원에서 얻는 관념적 깨달음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을 ‘바보’는 잔인한 현실에서 얻었다. 이 ‘바보’가 스스로 몸을 불태움으로써 남한의 자생적 진보는 횃불을 올릴 수 있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모두 지극히 옳은 말씀이다.
전태일의 단순한 외침-‘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은 남한 사회의 지식인과 기득권층에게 산업 사회에 진입하는 남한 사회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태일 분신에 대한 두 반응
순종해야 할 무지렁이가 내뱉는 정당한 외침, 이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자본가와 압제자들은 경종을 느끼기보다 분노에 찬 짜증을 내었다. 멀건 죽 한 그릇 더 달라는 올리버를 팽개친 구빈원 원장처럼 말이다.
순수한 영혼의 외침에 경종을 받고 청계천에서 계속되는 닭장 속 같은 삶의 고통을 동감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젊은 지식인과 양심적인 종교인들이 모였다.
죽은 지 3일 뒤인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 1백여 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서울 상대생 4백여 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 뒤 많은 대학도 추모 행렬에 가담했다.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 신도 40여 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했는데, 여기서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했다.
젊은 지성인들과 양심적인 종교인들은 미처 몰랐던 노동자의 모진 삶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언론도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 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에 대항하는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1979년 YH 여공들의 투쟁은 전태일 정신의 총화였고 캄캄한 유신을 끝장낸 도화선이었다. 22년밖에 살지 않은 무지렁이 전태일, 이 미약한 사람의 진실한 힘이 역사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 위대한 청년 조영래
조영래는 전태일보다 한 살 많은 1947년생이다. 전태일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조영래는 경기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에 수석 입학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1학기 때까지 가정교사를 하고 한·일 협정 반대 시위도 주도했는데 고3 2학기 몇 달 공부해 서울대 전체수석을 했다”고 한 지인이 말했다.
조영래가 공부를 잘한 것은 전설에 가깝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이었다. 조영래는 강의를 듣지 않고 턱을 괴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열심히 강의하는 선생님의 눈에 조영래가 매우 거슬렸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렇지 수업시간에 한눈파니 선생님은 자존심이 상해 살그머니 조영래 가까이 가 보았다. 조영래는 쏟아지는 눈을 감상하며 한시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영래는 공부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서울대 나온 천재 중에 세 사람을 꼽으라면 조영래를 포함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면서 사회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우리 교육제도에서 예나 지금이나 학업이라는 기능적 성과와 지혜?도덕?정의 같은 인간적 성숙을 동시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 중 덕담을 하는 선생님에게 공부 잘하는 놈이 ‘에이, 공부나 합시다!’라고 학생이 선생님에게 핀잔을 줘도 꼼짝 못 하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조영래는 희귀 돌연변이였다. 경기고 재학 시절 수석을 놓치지도 않으면서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았다.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김선주와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경기여고에 다니던 김선주는 경기고 다니던 조영래를 눈여겨봤는데, 하교하면 교복을 입은 채 쌀가게 하는 아버지를 도와 쌀 배달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1965년 서울대학교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덕분에 박정희에게 초청을 받아 청와대 구경도 했다. 입신출세가 보장된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도 버릇은 여전해 박정희의 한일회담과 3선 개헌을 반대하며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6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1970년 전태일의 장례식이 서울 법대 주관으로 치렀을 때 조영래도 참석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 4월 만기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쫓기는 생활을 했다.
위인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래는 도피생활하면서 전태일의 영혼에 찾아갔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씨를 만나고 당시 전태일과 함께했던 청계천 노동자와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볐다. 조영래가 본 것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었다. 많은 노동자를 만나며 지식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에게서 삶은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도피기간동안 전태일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으로 1983년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출간되어 우리나라 노농운동사에 가장 큰 울림을 남겼다.
1980년 복권 후 사법연수원에 복귀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수재민 집단소송 등을 수행하면서 인권변호사로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80년대를 관통한 조영래의 활약과 그 역사적 의미는 몇 권의 책으로도 턱없이 모자란다.
1987년 6?10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개헌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어부지리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전두환의 쿠데타 정권을 청산할 기회가 날아가 버리자 조영래는 줄담배를 피우면서 쓰라림을 달랬다. 1990년 폐에 생긴 암이 위대한 영혼을 질식시켰다. 조영래의 이러한 병명을 누군가 ‘시대암時代癌’이라고 불렀다.
다시 정리해보자. 전태일은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다.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로 된 책과 씨름했다. 그는 이때부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게 자신이 죽고 난 뒤지만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위대한 청년’ 조영래가 찾아왔다. 아름다운 청년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 고통의 본질을 알아냈고, 위대한 청년은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내려와 그 고통을 이 세상에 드러내었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 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근대사에서 동학의 두 주역인 최제우와 전봉준의 만남처럼.
나는 우리나라에서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민중의 위대한 자각-다시 말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시대모순을 돌파한 시대정신-을 두 가지를 꼽으라면, 썩은 왕조체제에 저항한 전봉준의 동학농민항쟁과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자각을 일구어낸 전태일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모든 민주화운동은 이들 두 분-전태일과 조영래-에게 가장 많은 빚을 안고 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김상봉 교수의 ‘철학의 헌정’ 서문에 있는 글이다.
『이 책은 5.18에 바치는 헌사인 동시에 부마항쟁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광주와 부산·마산을 물신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사실 보다 본질적인 근원을 따지자면, 1980년 광주와 1979년 부산·마산의 시원은 대구다. 왜냐하면 거기서 전태일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구는 박정희의 도시가 아니라 실은 전태일의 도시다.
…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그리고 1980년의 광주는 1970년 11월 불꽃이 되어 작렬한 전태일의 눈물이 여기 그리고 저기에서 펼쳐지고 부활한 사건에 다름 아니다.』
전태일 서거 45년, 조영래 서거 35년, 지금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진보는 전태일과 조영래가 보여준 삶의 의미를 복원해야 한다. 이분들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요, 시대정신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우리는 이 횃불로 암흑을 밝히고, 끊임없이 솟는 이 샘에서 자유와 평등의 목마름을 해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