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주제는 당연 성소수자 문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활동하는 정치가는 물론 학자와 시민들도 유독 이 주제만큼은 미온적이다. TV 토론회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도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홍역을 치렀다.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 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뜻이라 해명했지만, 성소수자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사고가 바뀐 것은 아니다.
몇 해 전 동료교수들에게 물었다. 만일 자녀가 성소수자임을 밝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대여섯 명의 교수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당장 호적에서 파버려야지.” ‘호적’에서 파내는 것으로 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성 정체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고, 커밍아웃하는 순간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고 소수자의 길을 걸을까.
모든 사람은 삶의 주체로서 자기결정권이 있다. 개인은 사생활 영역에서 국가권력의 간섭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도 개인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다고 해석된다. 이 같은 법해석과는 달리 헌법재판소의 판단 태도는 아주 소극적이다. 헌재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판단을 주로 간통죄나 혼인빙자간음죄 등과 관련하여 내리고 있을 뿐, 동성애자에게까지 인정되는 헌법상 기본권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
LGBT(Lesbian-Gay-Bisexual-Transgender)로 대변되는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법적 보호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독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이리도 엄격하다 못해 냉혹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도덕과 윤리에 따른 사회제도가 다분히 이성애주의에 의거하여 형성‧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법은 혼인이나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이성간 결합으로 본다. 가족도 그 결합에 의해 이뤄지니 당연히 동성혼도 인정되지 아니한다.
하지만 법제도는 시대의 가치와 환경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제는 이성애주의만이 아니라 동성애주의도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령 후자의 가치에 보편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적어도 동성애자들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인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헌재의 소극적 판단 태도와는 달리 유럽인권재판소는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에 대해 전향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다. 재판소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결정권을 가지므로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는 기본적 인권은 동성애자에게도 인정된다.
특히, 동성애자들의 성생활은 유럽인권협약 제8조의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에 포함되므로 국가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다. 국가의 이 권한은, 만일 동성애자들의 성생활이 제3자에게 해롭거나 위험한 활동인 경우에 한하여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제한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동성애 혹은 이성애를 떠나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개인은 이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을 위하여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해롭거나 위험한 성질을 포함한 활동을 추구할 수 있다. 어떤 사생활을 할 것인가는 오롯이 개인 취향이다.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는 자신이 책임지면 된다.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는 개인의 성적 성향일 뿐 이성애의 시각으로 동성애를 차별하거나 혐오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안토니오 보토는 자신의 시 <소년>에서 노래한다.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 단지 키스뿐이에요.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나요?” 그렇다. 단지 키스일 뿐이다. 남이 하는 키스에 이러쿵저러쿵할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