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에는 노동단체들이 주최하는 전태일 기념식과 문화제가 열렸다. 12일부터 13일, 21일에는 개인 자격으로 구성하지만 사실상 시민운동 영역에서 전태일 시민문화제가 열린다. 그야말로 전태일 풍년이다. 노동단체가 매년 기념식을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약간 서운하다. 올해는 알고도 참석하기가 머쓱했다. 노동자 외에는 전태일 기념식에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시민문화제 추진위원이 300명을 넘어선 걸 보면 그 얘기는 성립하지 않을 것 같다. 갑자기 등장한 시민문화제도 우리를 황당하게 한다. 마치 어느 문화기획사가 시민을 대상으로 이벤트 하는 방식과도 유사하게 느껴진다.
전태일 행사를 주최하는 양 단체들은 별로 협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우리는 노동, 우리는 시민이라고 분업화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 이 분립이 어색해서 일부에서는 내년부터는 통합해야 한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또 대체로 통합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짐작도 있는 듯하다. 과연 통합하면 이 문제의 근원적 본질이 해소될까? 아마 노동 쪽에서는 전태일은 노동자니까 노동투쟁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이 행사에 애착을 가질 것이다. 시민운동 영역에서는 전태일의 희생이 민주화운동의 맥락으로 이해되는 부분에 더욱 관심을 둘 것이다. 그래서 통합도 쉽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먼저, 전태일 행사를 노동단체 내부에서만 개최해온 것에 대해 대단히 아쉽다. 전태일은 노동단체의 노동운동가인가?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운동가들에 대해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이 되라’고 나무랐다. ‘경제투쟁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정치투쟁’도 반대했다.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을 정치투쟁의 최대치로 생각하는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은 레닌의 꾸지람을 받기에 아주 적절하다. 전태일의 희생은 경제적 이슈이지만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갈망한 그는 사회의 근본 변혁을 지향했다고 보아도 충분할 만큼의 이론 자원을 지녔다. 정치변혁투쟁은 노동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노동자의 조합주의와 같을 수 없다. 노동자가 주도하여 모든 대중을 궐기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전태일 기념운동은 노동자가 주도하여 모든 시민에게 변혁적 가치를 알려야 한다. 하지만 노동운동단체들은 늘 자기 속에 갇혔다. 그건 그토록 레닌이 경계했던 경제주의이다.
시민운동 영역은 도대체 전태일문화제를 왜 기획하는가? 이미 노동단체의 행사가 있는데, 이와 함께 하고, 그리고 시민영역으로도 확장해갈 필요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인가? 전태일을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전유할 정치적 필요가 있는가? 아직 뚜렷한 목표를 세운 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또 하나, 시작부터 문화제는 무엇인가? 전태일을 문화적 자원으로 전유할 생각을 하고 있는가?
먼저 문화제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필자는 언젠가부터 운동사회가 문화제를 다발적으로 개최하는 데 대해 비판적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공동 저서인 <계몽의 변증법>을 썼다. 그 핵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이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 억압적 현실을 은폐하고 노동자의 주체의식을 상실케 하며 착취와 수탈을 당연시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운동사회의 문화운동은 이 문화산업을 물리치는 전사의 기능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요새 운동사회의 문화제를 보면, 정확하게 말해서 운동단체의 행사장에서 공연되는 문화제가, 문화산업일까 아니면 문화운동일까 헷갈릴 때가 많다. 자본주의의 상업정신은 체 게바라조차 문화적으로 소비하고 만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전태일은 누구이며, 그의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다양한 세력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전태일을 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유란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어인데, 계승과는 달리 필요한 부분만을 자기 이론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누구는 전태일을 노동조합투쟁의 열사로 전유할 것이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으니. 근로기준법은 자본주의 사회에 일반화된 법률이다. 그래서 그 요구는, 언어만으로 볼 때는 경제주의적 요구이며 부르주아적 요구다.
아니면 민주 투쟁적 요구로 가져갈 수도 있다. YH무역여성노동자투쟁, 오원춘 사건과 함께 그 시대 민중투쟁이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즉, 경제주의적 노동의 요구든, 민주화운동의 요구든, ‘만약 거기에만 머문다면’ 모두 부르주아운동의 일환일 뿐이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망쳐버린 자본가들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레닌은 노동조합주의를 비판하면서 ‘부르주아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 편에 설 것이냐, 그 중간은 없다’고 했다. 어설픈 노동조합주의와 민주화운동은 자본가를 도와주는 운동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전태일의 희생은 원형적이라서 그 정치적 의의를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간절한 ‘노동해방’의 요구로 승화되기에 충분하다. ‘노동단체와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과 동의어로서의 노동해방이다. 그의 요구와 희생은 혁명과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수립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만약 노동운동이 전태일 기념식을 혁명으로 계승하지 않는다면 경제주의의 딱지를 절대로 뗄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노동단체들이 주도하여 노동자들에게, 시민들에게 그 변혁성을 알리는 데 노력해야 한다.
전태일을 매개로 노동운동은 훨씬 더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한 필요에서 시민영역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전태일 대구시민문화제’의 주체와도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도 포함된다. 내년에는 통합하자는 대중적 기대에는 분명 일말의 진리가 있다. 물론 필자는 노동주체성 있는 통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노동주체성이 노동자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사회구성원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개념 즉, 이 언어의 창조자가 원래 의도한 바를 전제로 할 때 말이다.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실현하겠다는 경제주의를 넘어서서 전 국민의 이해에 앞장서는 혁명의 원칙을 세우고 이를 전 사회적으로 공유해가겠다는 다짐을, 이 일을 계기로 다시 다짐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