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기억합니다. 그가 부딪혔던 환경이 여전히 반복, 변주, 심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태일 50주기를 앞두고 애니메이션, 여러 출판물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로서 대구의 출판사 ‘한티재’와 기획하여 청년, 시민들과 함께 읽을 “태일과 함께 그늘을 걷다(가제)”라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첫 작업으로 뉴스민의 지면을 얻었습니다. 저는 전태일이 삶을 시작한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합니다. 감자밭을 일구고, 동백 두 그루를 돌보고 있습니다. 2016년 세월호 수업을 했다고 교육청의 요란한 조사를 받고 쓴 글 ‘나는 너와 함께 물가를 걷겠다’가 공저 “광장에는 있고 학교에는 없다(교육공동체 벗)”에 실려 있습니다.
[태일과 함께] ① 전태일의 선물, 조각 내복
전태일을 다시 만나려는 이유가 있다. 억눌린 시대에 바보회와 삼동친목회를 이끈 씩씩한 운동가여서만은 아니다.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젊은 목숨을 던져 세상에 호소한 강한 인상 때문만도 아니다. 보통 사람은 흉내내기 어려운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은 숱하게 많다. 그저 죽은 지 50년이 되었다는 10년 단위의 산술적인 이유만은 더더욱 아니다.
그 참된 이유는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다. 실망할 수도 있지만, 그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좁은 다락방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 냄새 나는 짧은 삶의 여운 때문에 우리는 다시 그를 찾는다. 지금도 봉제노동자들은 전태일의 ‘풀빵 연대 정신’을 기억한다. 점심을 거르고 평화시장 옥상에서 짧은 해바라기를 하고 다시 일을 하다 꾸벅꾸벅 졸고, 오줌과 갈증을 참아가며 종일 일하는 시다들을 외면하기가 당시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재단사였다면. 다들 그렇듯 호통치고 매질하기에 바빴을 터. 잠 깨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면서.
그런데 전태일은 자기 버스비 30원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시다 대여섯 명과 나눠먹는다. 꼭 자기는 먹었다고 뻥치고 말이다. 허기진 배를 감추고는 동생 태삼의 버스비로 풀빵 사먹고 걸어가자고 조르는 통에 태삼은 형과 다니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빈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늦은 밤에 세 시간씩 걸어 집에 가다보니 통금에 걸려 경찰서 신세를 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태일 평전>이 전해온 일화를 지금 우리는 낡은 책장에서 꺼내고 있는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책을 품고 온몸에 불을 당긴, 동대문 평화시장 스물세 살 재단사 전태일.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하루 16시간씩 통풍도 안 되는 캄캄한 골방 다락에서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시다들의 휴일은 한 달에 단 이틀이었다. 월급은 업주 마음대로, 일은 시키는 대로! 그 시대의 진리였다. 착취가 착취인 줄 몰랐던 그 먼지구덩이 속에서 몇 년 일하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해고되고 죽기까지 하였으니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얼마나 절박한 사정이 압축된 구호였던가.
근로기준법에는 버젓이 1일 8시간 일하게 되어 있고, 1주일에 반드시 1일 유급휴가를 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법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근로기준법은 지킬 필요가 없는 분위기. 박정희 군사정권은 다시 싹트던 민주 노조와 시민사회단체를 없애버렸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반려견으로 길렀다.
근로감독관은 노동자들보다는 기업주와 짝을 이루었고, 경찰과 정보기관은 일터의 불만을 감시하였다. 절대적 가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선성장 후분배!’의 드높은 구호 아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일할 젊은이들이 거덜난 농촌을 떠나 꾸역꾸역 서울로,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은’ 시대의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후분배’의 ‘후’는 과연 도래했는가, 아니면 영원한 유예의 속임수인가, 우리는 의심하고 있다. 왜, 목표치는 아직도 갱신되어 높은 액수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보자.
당시 한국사회는 무조건 밥을 먹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모두 덮었다. 남북 적대적 공존의 서막 아래 노동은, 인간의 존엄에 복무하기보다는 성장률의 상승에 동원되었다. 분배는 뒤로 미루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한 가운데 사람들은 노동에 기본권이 있다는 것조차 대부분 인식하지 못했다.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1960년 한 해를 제외하면, 해방 후 20년 넘게 뿌리뽑히고 낙인찍혀 왔기에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좀처럼 일어설 힘을 얻기 어려웠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순서는 따로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는 좀처럼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람보다 돈이 귀하다는 법칙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내면화되었다.
태일은 모든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까맣게 때가 끼도록 공부한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태우려고 마음먹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불탄 몸을 다시 세워 외치며 그는 견고한 세상의 벽에 마지막으로 온몸을 던졌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세상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난 후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의 어머니와 친구들, 노동자들이 뭉쳐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고 전태일이 바보처럼 굴리던 바퀴를 이어서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없어졌지만 새 세상이 생겨났고, 그의 끝은 다른 이들의 시작이 되었다. 청계노조 사무실 벽에는 전태일의 사진이 걸렸다. 1971년에 정권이 상가 사장에게 압력을 넣어 박정희의 사진으로 바꿔 달았지만, 어머니 이소선은 박정희 사진을 던지고 전태일 사진을 빼앗길까 종이에 싸서 품에 안았다. 1972년에는 노동교실 벽에 걸린 영부인 육영수의 사진을 떼고 사탕을 물고 있는 전태일의 야유회 사진을 걸기도 하였다. 전태일과 박정희의 이런 경쟁 아닌 경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늘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전태일은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고 있냐고, 세상은 좀 나아졌냐고. 그런데 사실은 전태일이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또 다시 전태일을 부른 것이다. 이제 잊을 법도 한데 전태일의 질문과 편지를 우리는 아직 간직하고 들추어본다. 우리를 찾아온 전태일에게 묻는다. 이 언덕은 어디까지냐고.
우리는 현재 거대한 사회적 죽음의 그물망 속에 숨 쉬고 있다. 한 해 이천 수백 명씩 일터에서 요절하는 데도 대비하지 않는 죽음의 그물. 강자는 적어도 일하다 요절하진 않는다. 실습생 이민호 군이 기계에 깔려 죽은 제주 생수공장 대표는 빨리 생산라인을 돌리지 못해 안달을 부리며 8천만 원을 내밀었고, 김용균이 죽어 겨우 개정한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에는 김용균이 생전에 한 일이 적용되지 않는다. 죽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비정규직으로부터, 약자들부터 죽어가는 사회인데 그것을 실제로 막을 수 없는, 아니 막으려 하지 않는 사회의 민낯을 우린 끝없이 보고 있다. 세상이 전태일 이후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단순하고도 절박한 목소리에는 복합적인 그간의 사정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최저임금과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세상이 망할 것처럼 몰아가는 언론과 기득권 정당, 재계의 집요하고도 데시벨 높은 스피커와 동공이 흔들리는 촛불 정부의 ‘사각지대’에서 이 사회의 청년들은 미세먼지로 덮인 뿌연 하늘을 보며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있다. 학교는, 어른들은 네가 열심히 하면 길이 열린다고 말하지만, 이건 그것과 별개의 문제이다. 선거권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드물게 만 19세에 멈춰 있다. 기성 권력은 미안해하지 않는다.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잘라 말한다. 한국 청년들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미성숙한 존재로 실존한다.
세상은 청년을 추켜세우지만, 그들의 미래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리를 내주지 않는 저 탐욕스러운 얼굴들을 보라. 왜 공단의 공장으로 가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엄한 눈썹들을 보라. 그들은 모든 걸 개인의 노력으로 돌려놓고 사회 틀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을 적대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허겁지겁 ‘흙’밥을 먹고,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다 보면 가뜩이나 짙은 시야는 더 좁아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래서 나는 전태일과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을 사는 청년들, 바삐 사느라 전태일의 고민을 잊고 만 어른들, 나처럼 잊지 않은 척하고 살아왔지만 사실은 앙상한 이야기만 기억하고 푹 꺼진 풍선마냥 전태일을 구호로 달고 ‘그냥’ 사는 또 다른 나들이 다시 걸어갈 이유를 조금이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우선은 태일이 굴리다 만 바퀴를 수많은 사람들이 굴려온 그 어느 틈바구니에 나도 어깨 한쪽을 들이미는 것이다. 찻집에 마주앉은 한적한 담소가 아니라 거리를 휘적휘적 함께 걸으며 ‘상황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나누는 숨가쁜 대화. 청년 전태일과 온종일 걷고 어깨 스쳐가며 수제비 사먹으며 나누는 길 위의 대화 수업.
전태일이 죽고 사장들은 깡패가 죽었다고 소문냈지만, 수십 년간 그를 추모하는 노동자들의 집회는 늘 불법이 되었지만, 사실 전태일은 따뜻하고 명랑한 수다쟁이에다가 멀리까지도 잘 걷는 오지랖 넓은 이웃 청년이었다. 그래서 전태일과의 동행은 유쾌하고 즐거웠다.
나는 그와 다니며 그의 죽음 못지않게 그의 명랑한 삶에 주목하게 되었다. 짧은 그의 삶에서 풍부한 유머와 입담, 삶에 대한 낙천성, 긍정과 배려의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기분. 전태일은 어깨동무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태일의 모든 박제화에 반대한다. 노동자의 불리함과 더욱 심해지는 고통과 처지를 외면하고 적당히 노사 평화의 전당 방 한구석에 집어넣으려는 대구 위정자들의 의도에 반대한다. 전태일의 삶을 과거의 것으로 거리를 두고 현재의 갈등을 은폐하며 오지 않은 평화에 가두는 것은, 미국 백인들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전태일이 여전히 가 있을 법한 현재의 고통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일한 성남의 학교와 인근 상가, 김군이 일하던 구의역, 학생들이 신나게 출발한 단원고 교실, 세월호가 닿지 못한 제주항, 태안 서부발전의 컨베이어벨트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곁, 제주 생수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옆, 진천의 씨제이 공장과 분당의 외식업체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이 마음의 지도 위에 연결되었다. 지도 위에 점을 찍는 순간 평화시장과 이곳들은 동시대가 되었다.
그 동시대의 지도 위에 전태일과 나의, 여러분의 질문이 겹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 룰과 습관, 언어들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경쟁적인지를 묻는다. 왜 노동조합은 여전히 불쾌한 언어이고 노동 인권 교육은 학교에 발 붙이지 못하는지를 묻는다. 왜 평화시장과 편의점에는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는 이야기뿐인지를 묻는다. 왜 학생들한테 일하는 사람보다 CEO가 되고 싶다는 답이 나오도록 세상은 유도하고 있는지 묻는다. 왜 경제와 노동에 관한 사회적 대화는 결국 경영자들의 입장이 존중되는지를 따져 묻는다.
사장님들이 돈을 쓸어담아 신당동에 호화주택을 장만할 때, 평화시장 사람들은 생활비를 아끼느라 남는 천으로 옷을 뚝딱뚝딱 만들어 입기도 했다. 도봉구 쌍문동 시절, 전태일은 옷 만들다 남은 천으로 앞뒤 색깔이 다른 내복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언젠가 좋은 새 옷을 사드리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약속을 지킬 수는 없었지만, 그 옷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귀한 옷이 되었다. 가격표를 붙일 수 없는 옷. 옷이 세상에 남아 어머니의 겨울을 함께 살았다. 이소선 어머니는 수십 년 후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 옷을 입으셨다.
나는 이소선의 내복 같은, 한 권의 책을 재봉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뒤지고, 떠오른 생각이 날아갈세라 메모장에 붙들어 매어 마음의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기사를 링크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며, 태일의 흔적을 찾아 쏘다니다가 다시 재봉틀 앞에 돌아와 앉는다. 수북이 쌓인 글감들을 재단해 이어 붙여 꿰매고 뜯어내고 다시 잇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첫인사만 해도 글 조각들을 수없이 꿰매고 뜯어내다 멈춘 우연한 한 벌이다. 지난 50년간 수많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전태일의 삶을 이야기로, 노래로, 영화와 연극의 대본으로 써내려 왔다. 나도 한구석에 슬쩍 앉아 글 재봉틀 한 대를 돌리며 그 기억의 현재성을 이어간다. 소란스러운 광장 한구석에서 첫 옷을 내밀어본다. 한번 입어보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