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둘기 울음 떨어지는 자리마다, 곡우 / 청보리 이삭 흔들리는 길로 가더라도, 곡우 / 꼭 다시 오마 하던 약속 같은 것은 너무 옛 일이라, 곡우”(「곡우(穀雨)」 전문)
변홍철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사계』(도서출판 한티재)를 지난 춘분 무렵 출간했다. 신작 시 61편으로 구성된 『사계』는 계절처럼 4부로 나눴고, ‘입춘’부터 ‘대한’까지 농사 절기에 맞춰 촘촘하게 그려갔다.
변홍철 시인은 “천주교 신자로 살면서 해마다 반복되는 종교 절기를 본다. 2009년 한 해를 농촌에 살았는데 농사 절기가 정확했다. 이런 경험으로 시집에 절기를 쓴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무성한 여름의 성(城)이여 // 너희를 무너뜨릴 힘이 / 슬픔의 단층을 따라 이미 움직이고 있다 // 꽃잎이 질 때마다, 꽃잎이 질 때마다 / 삼켜진 울먹임의 에너지를 감지하지 못하는 / 신록의 낙관이여 // 계절이 돌고 돌아, 또 다른 꽃이 필 때마다 / 새로운 바람은 불 것이다 // 저 못자리에서 자라나는 싱싱한 저주(咀呪) // 그러므로 나의 직업은 / 영원한 파멸의 서기(書記)라도 좋다 // 여름은 또 한 번의 패배여도 좋다“(「입하(立夏)」 전문)
『사계』 속에는 ‘곡우’, ‘입하’, ‘망종’, ‘하지’ 등 18개의 절기가 나오고, 절기를 제목으로 쓴 작품이 15편에 이른다. 그러나 『사계』의 시작은 새봄이 아닌 지난겨울의 「영주행」이다. 「무언곡」, 「순천만」, 「겨울 나무」를 거쳐서야 「입춘」이 나온다.
“청리 상주 함창 지나, 벼 밑동만 남은 논바닥 // 지난 망종 모내기 노래, 살얼음에 묶여 있는 / 그 노래 흉내라도 내듯 까마귀떼 원무를 추는 창밖 // 고라니 몇 쌍, 열차 소리에 놀라 / 햇빛의 파편으로 이따금 튀어 오른다 // 깨진 얼음조각 낮달이 서편 하늘에 오래도록 떠서 / 함께 간다, 죽은 벗들의 넋처럼 // 그중 하나는 오백만 원 빚을 끝내 갚지 않고 갔다 / 돌려 달라는 얘기도 차마 근 10년 하지 못했는데 // 점촌 용궁 예천 지나, 영주 가는 무궁화호 / 이 겨울 거기 무엇이 있는 줄 몰라도 / 가 보는 것이고, 얄팍하고 시린 그 무엇도 / 기어이 따라오는 것이고 // 세밑의 무섬마을, 내성천 위로 바람은 제법 불어 / 오래 전 장난처럼 건너기 시작했던 긴 외나무다리 위에서 /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한 채 // 자주 서편 하늘만 올려다보는”(「영주행」 전문)
김용찬(순천대 국어교육과 교수)은 발문에서 “계절들이 환기하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탈피하여, 시인이 응시한 현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작품들에 나타난 계절적 배경은 단일하지 않고, 또 다른 시간과 사건을 품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라고 썼다.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인 변홍철은 196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살았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며 동인지 『저인망』으로 시작을 시작했다. 도서출판 한티재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시집 『어린왕자, 후쿠시마 이후』, 산문집 『시와 공화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