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대성당(We Are All Cathedrals)”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가 일어난 뒤 잠시 주춤했던 노란조끼 시위 참가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사회 기저에 깔린 불평등을 호소하고 양극화를 개선하라는 자신들의 요구에는 묵묵부답하던 갑부들이 노트르담 성당 복구에는 앞다투어 거액을 기부한 것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갑부들이 하루 만에 1조원에 달하는 거액을 기부하자 이들은 “이것이 바로 불평등한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부호들이 경쟁적으로 기부를 이어가는 행태를 비난하고 나섰다.
한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노트르담 성당 화재 며칠 전 강원지역 대형 산불 재난이 터지자 이재민 지원을 위한 유명 연예인들과 기업들의 기부행렬이 이어졌다. 가수 아이유, 배우 박서준은 산불 피해 지역 복구를 위해 1억 원을 기부했고, 롯데그룹은 10억 원, 삼성그룹은 20억 원을 ‘기꺼이’ 기부했다. 이들의 기부행렬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송’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개인적으로 큰 금액을 기부한 유명인에 대해서는 ‘역시 OOO’이라는 칭찬과 함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돈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며 그들의 도덕적 인격을 추켜세웠다. 몇십 억 원을 기부한 기업에 대해서는 ‘아무리 삼성 욕해봤자 결국 이런 큰 재난이 터졌을 때 돈을 내놓는 것은 삼성’이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라는 말들이 오갔다.
기부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돈을 쥐여주는 ‘사적인’ 재분배 성격을 지닌 행위다. 사회적 불평등을 교정하는 작업에 있어 세금을 통한 국가의 강제적인 재분배가 아니라 ‘돈이 많은 개인의 의지’에 의존하는 행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에 의한 재분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돈을 기부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기부 행위가 중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분배 형식의 가능 유무는 기부자의 윤리적 의식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기부자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불평등의 개선도가 크게 달라진다. 두 번째는 기부자와 기부를 받는 사람의 관계가 철저하게 ‘갑’과 ‘을’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부나 자선은 사유재산권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행위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부를 받는 이는 전형적인 수혜자로 전락한다. 기부가 끊긴다고 해서 기부자를 욕할 수 있는 권리는 이들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기부문화’의 메커니즘 자체가 이처럼 강제적인 재분배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에, 사회적 불평등을 중요한 문제로 여긴다면 기부문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기부 문화가 그 동기의 ‘선함’과 연루되어 그 어떤 사회적 참여보다도 가장 훌륭한 방식의 사회참여로 위계화되어 있다. 그것은 다함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불행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선(善)‘이기도 하지만, 불평등을 개선하고 약자인 이들의 삶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본‘을 매개로 하는 가장 고민이 부재한 방식이기도 하다.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의 삶을 구호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방식에 있어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대기업들의 기부 액수가 온 천지에 전시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유럽은 경제적 불평등의 결함을 세금을 기반으로 상당 부분 보완한 곳이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시민들은 부호들의 ‘의지’에 상관없이 그들 재산의 일부분을 당연한 자신의 권리로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1조원의 거액 기부를 미화시키는 시도에 반감을 가지는 목소리가 이처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사회 유명인과 대기업의 다른 방식의 사회참여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재난이 발생했을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이러한 방식들이 함께 고려될 때, ‘기부’의 ‘선한 의지’가 사회에 더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