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마다 나이트클럽(boite de nuit)에서 졸도 직전까지 놀았다.” -<젤다>의 ‘미친 그들’ 중
젤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에서 만난 이 평범한 문장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한때 “나는 나이트에 가면 새벽 5시까지 놀아”라는 말을 하며 괜히 어깨를 으쓱하곤 했다. ‘강남역 뉴욕제과 앞’이 약속 장소이던 시절이다.
실제로 새벽 5시까지 나이트클럽에서 논 적은 딱 한 번이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나이트클럽이 새벽 5시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후에는 종종 그 한 번의 경험을 써먹었다. 유명한 호텔 나이트클럽에도 두 번 가봤다. 나는 괜히 자랑하고 싶어 ‘나 거기 가봤다’고 은근히 티를 냈다. 이것은 허영이다. 잘 노는 사람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이 허영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웃긴지는 나중에 알았다.
어릴 때 내게 클럽은 잘 놀고 감각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20세기 초에 ‘카바레 볼테르’에서 아방가르드의 상징인 다다가 탄생했다. 살롱은 18~19세기 프랑스에서 예술과 인문학에 대해 토론하고 사교를 나누던 장소이며 모임이다. 이 살롱은 주로 장소를 제공하는 ‘마담’이 주도한다.
루소 같은 철학자는 이 마담들이 지성의 흐름을 주도하는 현상을 마뜩잖게 여겼다. 그러나 카바레도, 살롱도, 마담도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오니 전혀 다른 의미로 진화했다. 룸살롱은 남성들의 유흥공간이고, 마담은 이 유흥의 장소에서 남성을 접대하는 사람이며, 카바레는 성인 나이트클럽이다. ‘성인‘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대체로 이상해진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 나이트클럽은 내가 아는 ‘춤추는 곳’이 아니다. 춤추러 오는 여자들을 잡아먹으려는 남자들의 만찬장이다. 여자를 ‘공급’하고, 이 테이블에서 저 테이블로 여자를 끌고 가서 상차림으로 올리고, 여자를 시식할 기회를 남자들에게 제공하고, 본격적인 식사를 위해서는 일종의 소화제처럼 ‘물뽕’도 준다. 나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 아찔하다. 내가 동경하던 유흥의 장소가 폭력과 범죄의 장소임을 알아갔다.
이처럼 유흥이 남성주도적인 사회에서 노는 여자는 타락한 여자다. 창녀의 ‘창娼’은 ‘노는 계집’을 뜻한다. 노는 여자는 곧 ‘몸을 파는’ 여성이고, 이 몸을 파는 여성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여성으로 취급한다. 성매매 여성을 윤락, 곧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뜻으로 ‘윤락 여성’이라 부른다. 성매수 남성을 윤락 남성이라 하진 않는다. 윤리적으로 타락한 이 여성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클럽을 찾은 노는 여자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놀이의 대상으로 대한다.
재즈 시대 ‘노는 여자’의 상징인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의 글에는 20세기 초 파리의 나이트클럽 풍경도 자세히 나온다. 유명인들이 모이고, 웨이터들은 이 유명인들을 명성에 맞는 자리에 앉히려 애를 쓴다. 유흥과 지성이 뒤섞인 이 장소에는 사교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 나이트클럽에서 젤다의 소설 속 인물은 졸도 직전까지 논다. 왜 그는 유흥에 빠졌을까. 여성에게 타락의 증표인 유흥은 쟁취해야 할 영역 중 하나다.
“내가 말하는 권리는 내일이면 죽고 없을, 속절없기에 더 애틋한 자기 자신을 실험할 권리를 말한다.” -<젤다>의 ‘플래퍼 예찬’ 중
젤다에게 여성의 꾸밈과 유흥은 그의 표현대로 ‘존재의 예술’이다.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에서 법관의 딸로 태어난 젤다는 여자들을 제약해온 보수적인 전통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제 욕망을 드러내며 인생을 즐기는 ‘신여성’ 플래퍼(flapper)였다.
놀이의 대상으로 여성을 규정짓는 사회에서 쾌락을 대놓고 즐기는 여성은 기존의 여성상에 대한 도전이다. 그를 여전히 사치스럽고 남성 편력이 심하여 남편 망친 여자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에서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정신병에 걸린 아내 젤다에게 헌신하는 남편으로 그리기도 했다. 젤다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얼마 전 신기한 신문 사설 하나를 접했다. 이 사설은 이혼 사태, 범죄 급증, 물가 상승, 부당 과세, 금주법 위반 사례, 할리우드 범죄들을 죄다 플래퍼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젤다>의 ‘플래퍼 예찬’ 중
무척 신기했다.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에서는 20대 남성의 현 정권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렸다. 심지어 20대 남성들이 ‘북핵 이슈’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선회한 원인이 “문재인 정부의 ‘친여성’ 정책 기조에 대한 불만의 표시인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페미니즘은 현재 남한사회에서 상당한 괴력을 가진 사상으로 보인다.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한 세기 전 미국에서 플래퍼 탓에 물가가 상승하고 범죄가 늘어난다고 하듯이 오늘날 남한에서는 페미니즘과 북핵까지 엮으려 하다니.
젤다의 정신병도 오늘날 시각으로는 딱히 근거가 없다. 창의적인 남성들은 범죄까지 옹호받지만, 창의적인 여성들에게는 독창적인 표현이 오히려 정신병의 근거로 작용했다. 여성의 창의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는 방식이 ‘미친년 만들기’다. 젤다가 쓴 단편소설이나 산문을 보면 얼마나 저돌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루주는 여자가 남자를 직접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젤다>의 ‘연지와 분’ 중
성인이 되면 사교계에 정숙한 신붓감으로 데뷔해야 하는 미국 남부사회를 그는 벗어나려 했다. 머리를 자르고 입술을 붉게 바른다. 이는 선택받는 인형이길 거부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 제 욕망을 드러내고 표현하겠다는 의지다.
2014년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 <Z: A Novel of Zelda Fitzgerald>는 젤다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구성한 소설이다. 그는 서재가 ‘아버지의 장소’라는 점, 그 아버지는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는 점을 언급하며 상대적으로 자신은 애팔레치아 산맥 동쪽으로 넘어가보지도 못했음을 한탄한다. 스콧은 그에게 결혼을 통해 문화적 중심지인 미국 동부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말한 ‘남자를 직접 선택하겠다는 의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선의 도전이다.
젤다는 언론 기고를 통해 스콧이 자신의 일기를 표절한 사실도 능청스럽게 밝힌다. 실제로 젤다의 글은 두 사람의 공동작업으로 알려지거나 스콧의 이름으로만 출간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작가이며 ‘벨에포크의 비너스’라 불리는 자유분방한 콜레트도 처음에는 남편의 이름으로 글을 출간했다. 얼마나 많은 남성 예술가들이 여성 파트너의 창작에 무관심하고 의도적인 무시를 지속했는지, 때로는 그 여성들의 창작물을 은근히 제 것으로 삼기까지 했는지, 역사는 이 사실에조차 무심하다.
남편인 스콧은 젤다의 출판을 마뜩찮게 여겼으며 젤다의 소설을 ‘3류’라고 악평했다. 젤다의 작품 중 딱 한 편만 고르라면 ‘미친 그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글을 읽고 과연 젤다를 ‘3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콧은 지속적으로 젤다가 드러내는 ‘나’를 삭제하려 했다. 스콧은 “그놈의 ‘I’ 좀 집어치울 수 없어? 당신이 대체 뭔데?”라고 말하며 젤다의 원고에서 ‘I’를 ‘we’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젤다의 ‘나’는 지워졌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오늘날 젤다는 앨라배마주 여성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노는 여자가 안전할 때 이 폭력적 먹이사슬이 끊어진다. 노는 여자가 안전할 때까지 여자들은 제 자신을 실험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