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몰랐죠. 해방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우리 마음을 떠보려고 속이는 건 줄 알았어요. 최종적으로 우리 죄를 확인하려고. 그래서 우리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죠”
1945년 8월 15일, 안동형무소에 수감돼있던 장병하(92, 당시 18세)는 해방 소식을 믿지 못했다. 형무소 직원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기에 검찰 기소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줄 알았다. 해방이 되고 하루가 지나서야 한국인 직원이 해방이 됐다고 알려왔다. 그제야 함께 잡혀간 동지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관련기사=[모두의 뉴스민 시즌2#9] 대구 생존 독립지사 이야기, 장병하(92)(‘19.2.22))
장병하가 다니던 안동농림학교는 ‘갑종(5년제)’으로 경북 북부 지역에 유일한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1937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학교에서는 주로 군사 훈련이나 근로 봉사, 농촌 토지조사 등을 다녔다. 영어 수업도 없어졌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배웠다. 학교에서 한국말을 하다 걸리면 정학 1개월을 맞았다.
장병하가 3학년이던 1943년에는 학제가 개편돼 수업 연한이 줄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징병제를 공포했다. 만 20세가 되면 꼼짝없이 일본이 벌이는 전쟁에 끌려가게 됐다.
안동교회 앞 작은 서점을 장병하와 친구들은 자주 들렀다. 큰 서점은 아니었지만 조선문학전집, 일본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등이 있었다.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꾸려 서점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졸업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모임이 그렇게 된 거라요. 그때 우리가 읽었던 게 심훈의 <상록수>나 이광수 <무정>, <유정> 이런 책들이었어요. 농촌이 얼마나 어려운지 책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학교에서 농촌에 파견 나가서 토지조사, 실적조사 이런 거를 했어요. 우리가 봐도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젊은 청년들은 군대 끌려가고, 보국대 끌려가서 탄광이나 군수 공장에 갔고, 젊은 여자들도 정신대에 끌려가던지 위안부로 끌려갔어요. 이러다가는 씨를 다 말리겠다”
독서 모임은 점점 독립을 상상했고, 독립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일은 누가 해야 하는지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독서 모임은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하 회복단)’이라는 독립운동 조직으로 진화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더 모았다.
거사를 위한 단원을 모으는데도 신중해야 했다. 장병하는 “그때는 완전히 일본놈 다 됐다”고 회상했다. 날 때부터 식민지 교육을 받은 그들은 독립은커녕 일본이 망할 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학교를 다니다 ‘사상 불온’을 이유로 퇴학당했던 장병하의 동기생 이정선이 일본 유학을 다녀와 ‘명성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정선이 만든 소식지 여명(아께보노)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식이나 일본이 곧 전쟁에서 패망할 거라는 소식도 있었다.
“문예지였는데, 시도 있었고, 지(이정선)가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얘기라던지, 광복군이 어디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있다가는 다 징병 돼서 일본놈 총알받이만 되겠는 거예요. 우리가 거사를 하기로 계획하고, 명성회는 거사를 하면 한테(함께) 뭉치기로 했어요”
회복단은 참모부, 연락부, 특공부 등으로 꾸려졌다. 장병하는 동기생 황병기와 함께 참모부 일을 맡았다. 참보무는 단원을 총괄하는 역할이다. 이들은 안동헌병대를 습격하고, 안동경찰서를 털어 무장한 뒤, 안동읍사무소 방송 장비를 이용해 시내 방송을 할 계획을 세웠다. 학생들의 궐기 소식이 전해지면 다른 사람들도 동참할 거라 생각했다.
“그때 헌병대가 한 5명 정도라서 이 정도는 제압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요새처럼 핸드폰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때는 다 도보로 다니면서 길을 알아 놓고, 근처 모양이나 경찰서에는 누가 어디에 배치돼있었는지 연구했어요. 방송할 친구는 읍사무소 3층 가서 방송요원을 사귀어 놓고, 일본군 연락을 끊기 위해서 전화선을 어떻게 끊을지 전봇대 올라가서 연습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하지만 거사 계획은 두 번이나 미뤄졌다. 첫 번째 거사는 1944년 12월 경이었다. 회복단 주축이었던 8회생의 졸업이 갑자기 12월로 앞당겨졌다. 두 번째 거사 계획은 1945년 2월이었다. 거사를 계획하던 중 동기생 2명이 주고받은 서신이 발각돼 잡혔다. 세 번째 거사 계획은 일본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로 정했다.
거사일에도 장병하와 친구들은 평상시처럼 등교했다. 학교를 마치면 단원들이 신호를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장병하와 친구들은 안동경찰서로 잡혀갔다. 이미 며칠 전부터 경찰이 회복단의 주모자 급을 구속했고, 거사 계획도 알아차렸다.
“우리는 물샐틈없이 준비한다고 했어요. 3.1운동 독립선언서도 수 만부를 전국에 배부했는데 그 비밀이 안 새나갔잖아요. 우리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주모자급 아이들이 안 보이는 게 비밀 장소에 모여서 작전 계획 짜고, 지령을 준비하려고 숨었다고 봤어요. 그게 아니라 벌써 구속이 된 거예요”
뒤늦게 찾아온 독립의 기쁨도 잠시
출소하니 친구들은 흩어지고
신탁통치 찬반 운동으로 사회 혼란
김대중 정권 들어서야 독립유공자 인정
독립 후, 장병하는 1945년 8월 17일 안동경찰서로 다시 넘겨져 출소했다. 출소 당일 어느 건물에 모여 환영회를 했다. 한동안은 독립 운동가들을 한데 모아 처단하려는 것 아닌가 두려움도 들었다. 친일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독립 운동가들을 꺼려했다.
장병하는 어느 그룹에도 끼기 힘들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동기들은 졸업했다. 동기들은 제각기 고향으로 흩어졌고, 이미 졸업한 8회생도 찾기 어려웠다. 후배였던 10회생은 좌·우익으로 갈라져 신탁통치 찬·반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안동철도국에 취직 시험도 합격한 상태였지만, 해방 후 담당자가 바뀌니 아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이가 18살인데, 나오니까 무슨 애국자가 그렇게 많은지. 온 동네 만세 부르고 쫓아 댕기는 사람들은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정작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거기 나가면 싫어해요. 조금 있으니까 모스크바 3상 회의 찬탁반탁 운동이 일어나요.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우는기라요. 18살 내 상식으로는, 더구나 한국 역사도 못 배웠고 잘못하면 일본 사람이 될 뻔한 내가 들어보니 아무것도 몰라요”
장병하는 더 이상 운동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는 어렵지 않게 교사가 됐다. 학교에 있는 교장, 교감 등 선배 교사들이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 교육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어를 쓰고, 일본 역사를 배우고, 일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정부에서 나온 ‘교수 요목(교사용 지도서)’ 내용도 형편없었다.
결국 스스로 책을 찾아보고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조선종이(한지)’를 가지고 와 등사판으로 새 교과서를 만들었다. 야사가 섞인 역사책을 읽고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들려줬다. 학생들은 신라 경순왕이나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좋아했다.
“학교 교사들이 아무도 우리나라 역사를 몰라요. 선배들은 일제 강점기 교단에 섰던 사람이고, 나랑 같이 취직한 동료들은 만주에 어디 있다 온 사람,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래요. 우리도 우리 역사를 배운 적이 없잖아요. 가르치려면 내가 배워야 해요”
그는 독립운동 한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지만 알리지도 않았다. 국가에서 독립 유공자를 포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63년 서류를 만들기 위해 안동경찰서를 찾았다. 안동경찰서에는 남은 기록이 없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안동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을 조사하기 위해 기록을 다 가져갔다는 거다. 부산형무소 정부 문서 보관소에 가서 겨우 ‘형사사건부’를 찾았다. 기소되기 전 풀려났기 때문에 검찰 공소장이나 재판 기록도 없었다.
조선총독부 재판소가 작성한 형사사건부에는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직업은 안동농림 농과 4학년, 일본 이름, 한국 이름, 구속 날짜, 출소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기록이 이거 뿐이라요. 이거라도 내자 해서 우리가 활동한 내용을 적어서 냈는데, 포상을 할 수 없다고 해요. 그 서류가 뽀얗게 먼지가 얹혀있었는데,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를 포상해줬습니다. 당시에 학생들이 치안유지법으로 붙들려 간 게 틀림없고, 해방될 때까지 형무소에 있었으면 독립운동한 게 틀림없다 해서 포상을 받았습니다”
1999년 장병하와 동료 30여 명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 기록이 없으니 가장 낮은 표창을 받은 거다. 구속돼 고문을 당하다 숨진 동료 손성한은 애국장을 받았다. 표창을 받지 못한 동료들도 있다.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됐거나 해방 후 사회주의 운동을 한 동료들은 모두 빠졌다.
“우리가 독립운동할 때는 그런 게 없었지. 오로지 나라를 되찾자는 거였죠. 좌익이다, 우익이다는 해방되고 나서 좌익에 붙었나, 우익에 붙었나 그 차이라요. 해방되고 좌익으로 간 아이들이 많아요. 저한테도 포상 서류 내는 거 상담받으러 많이 오는데, 규정이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안 된다고 하니 내가 도와줄 길이 없어요”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뒤 그는 교직 생활과 더불어 광복회, 대구경북생존독립지사협의회 활동 등을 했다. 생존독립지사협의회는 2002년 생존지사 15명이 모여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달의 역사적인 사건 등을 함께 공부했다.
“생존지사답게 사는 길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교양 자료를 만들어서 주고, 1년이 지나면 제본을 했어요. 지금 일곱 번째 원고가 쌓여 있는데 미처 만들지 못했어요. 이걸 만들어서 줄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어. 지금 대구에 두 사람, 경북에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장병하는 “남북이 하나 될 때까지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어디 분단된 나라 얻을라고 독립 운동 했겠어요. 멀지 않은 장래에 남북이 통일되면, 남한하고 북한하고 차별 없이 한 덩어리가 돼서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우리가 마음이 안 맞고 대립해서 어떡하나 걱정이 많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