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의 가족 채무 불이행 폭로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는 연쇄적 폭로가 미투(#Me_too, 나도 고발한다)의 닮은꼴이란 이유에서 ‘빚투’(#빚_too, 나도 떼였다)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언론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 않은 조어를 보도에 적극 활용했다. ‘빚투’라는 조어를 재생산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언론의 모습은 실망스럽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미투’와 채무 불이행으로 인한 개인의 호소인 ‘빚투’는 명백히 다른 언어이다. 언론은 미투와 빚투의 다름을 고민하지 않고 있다. ‘‘빚투’는 성폭력 고발운동 ‘미투’에서 채무를 뜻하는 ‘빚’을 더한 합성어.’(국민일보. 2018.11.28)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언론은 미투와 빚투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단어인양 설명한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면 오히려 자신의 직장을 잃었고, 침묵하지 않고 신고를 하면 ‘꽃뱀’이란 인신공격을 받았다. 피해의 반복은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미투 운동은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소리에서 시작해 성차별 구조를 깨뜨리기 위한 운동으로 확산됐다. 또한 사람들과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끌어 내는 ‘운동’으로 경계의 제한 없이 발전했다. 저항의 서사가 담긴 미투와 개인의 연쇄적 폭로에만 기댄 빚투가 다른 이유다.
‘빚투’는 미투운동의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배제하고 ‘나도’라는 공감에만 초점을 맞춘다. 미투의 ‘나도’와 빚투의 ‘나도’의 쓰임에는 차이가 있다. 미투의 ‘나도’는 강요된 침묵 속에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위한 동기이다.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해결점을 찾는 공유의 시작이었다.
반면 빚투의 ‘나도’는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저항하는 사회적 약자의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개인 간의 채무 불이행에 따른 계약 파기만 존재한다. 채무 불이행에 관한 피해는 분명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하지만 ‘미투’에 기댄 표현이 아닌 피해 정체성을 드러내는 개별적인 표현을 통해 문제 해결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상황의 맥락을 제거한 질문인 ‘왜 따라갔느냐’, ‘싫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에 대답하기 위해 피해자인 자신의 ‘죄 없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했다. ‘미투’라는 단어가 있었기에 피해자임을 결백하지 않아도 공감과 유대감으로 형성된 발언의 힘이 생겼다. 미투는 피해자들 각자가 서로의 힘이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다짐의 힘을 ‘빚투’라는 단어가 빼앗았다. 피해자들의 언어는 또 다시 힘을 잃었다. 그래서 ‘빚투’는 불편하다. 누군가에겐 사회의 부조리를 깨뜨리기 위한 언어가, 누군가에겐 가십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사회로부터 억압된 피해자들의 발언 기회에 대해 야멸차다. 언어를 통해 발언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았으면 한다. ‘미투’의 활용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빚투’에서 불편함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미투’의 의미가 변질된 또 다른 ‘빚투’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언론은 사회적 약자들의 언어를 쟁탈하는 가해의 반복을 그만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