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2일, 슈퍼히어로들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들의 창조자, 스탠 리(Stan Lee)의 죽음을 기리기 위함이었지요. 그의 첫 일터는 마블이었습니다. 미국 만화책, 일명 코믹스(Comics)로 이름난 곳이지요. 그는 편집실 조수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헐크, 스파이더맨, 엑스맨, 아이언맨 등을 만들며 히어로물의 거장으로 거듭났지요. 그의 손에서 많은 가상의 인물이 탄생했습니다. 스탠 리는 그들에게 상상 초월의 힘, 초능력을 주었지요. 그런데 스탠 리가 미국의 코믹스 시장에 특별한 힘을 선사했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1930년대, 신문에서나 볼 수 있던 만화가 잡지책으로 변신했습니다. 동시에 코믹스의 전성시대가 찾아옵니다.(미국 초창기 만화는 칸 몇 개를 이어놓은 분량이었습니다. 마치 가느다란 천조각, 즉 스트립(Strip)크기였지요. 대부분의 내용은 코믹(Comic)한, 즉 가볍게 웃어넘길 정도였지요. 이때부터 미국 만화는 코믹 스트립(Comic Strip), 줄여서 코믹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비록 대공황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만화책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습니다. 쉽고, 재미나고, 무엇보다 값이 쌌기 때문이지요. 스탠 리 선생께서 코믹스 제작에 발을 들인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코믹스는 대공황의 비바람을 견뎌내고 꾸준한 독자층을 확보했습니다. 덕분에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사기를 올리는 선전물로 사랑받았지요. 비록 대부분이 슈퍼 히어로 이야기였지만요. 전쟁이 끝나자, 코믹스 제작자들은 여태껏 쌓아둔 힘을 바탕으로 스을~슬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장르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거지요.
그러나 몸풀기가 끝나자 난관이 버티고 있네요. 마치 슈퍼 히어로의 운명 같았습니다. 코믹스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게 다 그놈의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으로 크게 한몫 챙겼습니다. 하지만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 미국 산업 전반은 세계의 육박전에 정신 팔려 주춤할 수밖에 없었지요.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미국은 밀린 숙제를 하듯 급격히 신기술을 빨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종전 후 태어난 베이비부머의 세상은 부모 세대 시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복종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보다 자유롭게 생각을 풀어놓을 수 있었지요. 이들이 자랄수록 그 차이는 점점 선명해졌습니다. 이와 함께 애들은 애들일 뿐~!이란 인식이 깨졌습니다. ‘틴에이저’, 즉 십대에 대한 고민이 등장한 것이지요. 동시에 툭하면 청소년 비행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두 팔 걷어붙이고 자녀들의 관심사를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십대가 좋아하는 예술은 숙청 대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것들이 감히 내 자식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다니~!’ 락(Rock)이 악마의 음악이란 시선도 이때 생겼지요. 코믹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시민 단체, 교육업계 종사자들, 종교 관계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나섰습니다. 이들은 투서와 시위를 통해 만화책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만화가 우리 애들을 망치고 있어요오~!’ 결국, 코믹스 산업에 빨간불이 켜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순수의 유혹>이라는 책이 등장하네요. 저자 프레드릭 웨덤(Fredric Wertham)은 심리학자였습니다. 그는 앞서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앞뒤를 재지 않았지요. 웨덤 박사는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대, 가난한 흑인 환자의 정신과 치료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박사님은 예술을 몰랐습니다. 그는 만화가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독이라 판단했고, 어린이들에게 만화 판매를 금지하자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이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순수의 유혹>을 통해 장르를 불문하고 성적, 폭력적인 만화 장면만을 콕콕 집어 소개했습니다.
하이고 참나, 아이들을 위한 만화를 따로 만들자고 하면 될 것을, 아이고 속 터져~! 눈치 없게도, 책은 불티나게 팔립니다. 안 그래도 열 받은 사람들이 베스트셀러 때문에 더 뜨겁게 끓어올랐지요. 부글부글…그 소리가 미국 정부로까지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 순간, 그들의 귀가 쫑긋하네요. 무언가를 억압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지요.
당시 미국 정부는 희한한 논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억압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었지요. 그 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찾아야 하니까요. 미국은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친다고 목에 핏대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소련을 견제해야겠다는, 냉전에서 승리하고 말겠다는 야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요.
1950년, 그 야심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가 연설 중 폭탄 발언을 합니다. 그는 국무부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참나, 누군지는 말을 안 해주네요? 말해주면 끝날 일을 괜히 긴장만 더합니다. 사실, 그가 의도한 것은 미국 사회에 대한 수색권(搜索權)이었습니다.
인권이고 나발이고, 나라를 망치는 공산당을 찾아 뿌리를 뽑아야 하니, 마음대로 발가벗겨 확인하더라도 참으라는 소리였지요. 뻔할 뻔 자의 레퍼토리였지요. 테러리스트가 있으니 전쟁을 해야 한다, 공산주의자가 있으니 간섭을 해야 한다~! 그러니, 정치인들에게 코믹스를 제제하여 사회를 정화한다는 논리는 희소식이었겠지요.
쇼가 시작됐습니다. 1954년, 미국 정부는 코믹스를 두고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호러(horror)만화를 집중 추궁했습니다. 호러의 무섭고 끔찍한 장면이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해친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만화 작가들의 속마음은 이랬을 겁니다. ‘호러가 호러 맛이 나서 호러라고 한 것인데 왜 호러냐고 물으시면…’ 뉴욕 타임즈는 당시 청문회에서 발언한 EC 코믹스의 윌리엄 게인즈의 명언을 머리기사로 실었습니다.’호러에는 해(害)가 없다.’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청문회는 별 소득 없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도마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코믹스는 공식적인 사회악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만화 산업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우선, 다 같이 뭉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만화잡지협회(Comics Magazine Association of America, CMAA)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발등의 불을 해결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우선 팔고 봅시다~!’
그들은 코믹스 코드(Comics Code)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만화 검열 규칙이었습니다.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지, 장르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었습니다. 코믹스 코드는 무조건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부분을 콕콕 집어냈습니다. 그들은 검열을 통과한 만화의 표지에 우표처럼 생긴 승인 딱지를 따악~! 붙여줬지요. 도덕주의자들은 두 팔 벌려 환영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상은 변해갔지만, 이들의 검열 기준은 점차 도를 넘었습니다. 권선징악이 아니면 아웃~! 말투도 건전하지 않으면 아웃~! 게다가 책방은 오랜 관행으로 딱지 없는 만화를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만화가들은 처음부터 아이들 보기에 건전한 수준의 만화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그래픽 예술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공식이 들어섰습니다. 예술의 자유는 공식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1970년대의 어느 날, 미국 보건복지부가 마블의 스탠 리에게 특별 요청을 합니다. 마약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만화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지요. 스탠 리는 스파이더맨의 이야기 속에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얹어주었습니다. 등장인물 중 하나가 마약 때문에 폐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만화잡지협회도 반길 만한 내용이었지요. 스탠 리, 자신 있게 스파이더맨을 검열 공장에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웬걸, 만화잡지협회가 딱지를 붙여주지 않네요. 그들이 스탠 리의 만화를 거부한 이유는 마약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약의 ‘마’자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검열을 넘어, 노이로제 수준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의 잣대에만 기댈 수는 없었습니다. 스탠 리는 그길로 마블 편집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우리, 딱지 없이 만화 한 번 팔아봅시다!”
만화잡지협회가 막강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스탠 리의 선택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언론이 하나둘 이 사건에 주목합니다. 대중은 술렁였지요. 코드가 세상의 변화와 동떨어져 가고 있다면서요. 책장수들 역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승인 딱지 없는 만화책도 팔기로 한 것이지요. 이로 인해, 시종일관 검열을 의식했던 만화가들에게 새로운 문이 열렸습니다.
만화가들은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보다 다양한 소재로, 보다 다양한 독자층을 타깃으로~! 이러한 변화는 독립 출판물의 시대를 불러왔습니다. 기성 주류 문화를 뚫고,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코믹스가 등장하기 시작한 거지요. 동시에, 코믹스 코드는 점점 힘을 잃어갔습니다. 심지어 만화잡지협회 회원들도 자성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코드가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방해한다는 거였지요.
결국 2011년을 마지막으로, 코믹스 코드의 검열을 받는 만화가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누가 만화를 점검하느냐고요? 만화가들이지요! 어떤 예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 그것을 예술가가 직접 쥐고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코믹스 코드의 권리는 ‘만화의 법적 대응을 위한 기금(Comic Book Legal Defense Fund)’으로 넘어갔습니다. 만화가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단체였습니다.
미국 코믹스의 역사는 우리에게 절대적 명제는 없다고 말해줍니다. 명석했던 사람, 니체는 이렇게 말했지요. ‘전 세계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이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 된다.’ 대중의 편견과 정치적 상황까지 더해 코믹스의 수난은 육십 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한 사람의 의문에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왔지요. 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탠 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