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문화원 폭파범이라며 고문·국보법 씌운 사건, 35년 만의 재심

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 빌미로 고문·엉뚱한 실형 선고

16:54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을 빌미로 불법 연행돼 고문당하고 국가보안법 등으로 처벌받은 시민들에 대한 재심이 시작됐다.

25일 오전 10시 45분, 대구지방법원 형사2단독(판사 장미옥)은 박종덕(59), 함종호(61), 손호만(59), 안상학(57), 우성수(사망) 씨에 대한 재심 재판 첫 기일을 열었다.

▲함종호, 손호만, 박종덕 씨(왼쪽부터)

이날 재판에서 검찰은 재심 신청인들에 대한 과거 검찰 공소 요지를 설명했다. 83년 11월 22일 자 대구지검 공소장(검사 김동섭)에는 신청인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집시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검찰은 신청인들이 공모해 83년 경북대 학생들이 시위를 모의하거나, ‘불온서적’ 내용을 전파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찬양하거나, 불온서적 소지 등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고 공소장에 적었다.

재심 재판에서 검찰은 “(신청인들이) 대규모 학생 시위를 감행하기로 공모하고 철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시위를 계획했다”라며 “‘변증법적 유물론’ 등 교육을 하고 불온서적을 소지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김진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미문화원 폭파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피고인 조사하다 아무런 혐의 사실을 찾을 수 없었다. 허위 자백을 받은 것으로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에 대한 2차 심문 기일은 오는 11월 22일 열린다.

25일 오전 9시 30분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대구경북민주화계승사업회 등 9개 단체는 법원에 국가폭력과 인권침해를 인정하라는 취지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25일 오전 9시 30분 대구지방법원 앞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인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함종호 씨는 “불법 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했다. 인간적 치욕을 느꼈다. 동료의 정보를 누설하고 열패감으로 평생을 살았다”라며 “조작된 구속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했다.

손호만 씨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다. (고문으로) 내가 폭파범이라고 자백까지 했다. 전말이 밝혀지지 않았으면 실제로 폭파범이 됐을 것”이라며 “당시 대구에 있지도 않았는데 나더러 포병이었기 때문에 폭발물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라고

박종덕 씨는 “3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내게는 (고문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 같다”라며 “밤마다 고문당하는 꿈을 꾼다. 우리 사건을 계기로 당시에 같은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진상이라도 알려졌으면 좋겠다”라고 설명했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은 1983년 9월 22일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에 있던 미문화원에서 폭탄이 터지며 경찰 등 4명이 중경상을 입고 고등학생 1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공안 당국은 경북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을 주도자로 지목하고 신청인들을 연행했다. 이들은 영장도 없이 원대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이들이 구금되어 있을 때 정작 이들에 대한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의 빌미였던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은 수사가 종결됐다. 대구시경찰청 수사본부는 83년 11월 3일 ‘미문화원 폭파사건 수사상황 보고’를 통해 “관련 혐의자나 목격자를 발견할 수 없다”라며 “북괴공작원 2~3명이 직접 침투하여 폭파 후 복귀한 것으로 판단되어 더 이상 수사를 계속하더라도 성과가 없을 것으로 전망되므로 본 사건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 누명쓰고 고문·투옥당한 이들, 재심청구)

같은 해 12월 열린 공판에서 대구지법은 이들에게 국보법, 집시법 등 위반죄로 징역 1~3년 형을 선고했다.

2005년 박종덕 씨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립되자 조사를 신청했다. 함 씨 등 피해자 5명은 진실위 조사에 응했다.

진실위는 이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2010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진실위는 “신청인이 약 30일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잠 안 재우기, 구타, 관절 뽑기 등 가혹 행위를 당하는 등 인권을 침해받았고, 미문화원 사건과 달리 별건 반국가단체 고무 찬양 동조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는 관련 법에 따라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2015년 대구지법에 재심을 신청했고, 법원은 재심을 받아들였다.

▲재심재판에 참석하는 함종호, 손호만 씨(앞줄 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