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구하라 씨와 최 모 씨 사이에 벌어졌던 폭행 공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최 모 씨가 사생활이 찍힌 영상으로 구 씨를 협박했다는 정황이 밝혀지면서다. 최 씨가 폭행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기 전후에 모 언론사에 말했다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다’는 사진과 영상이, 실은 불법 촬영물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뒤집어졌다. 불법 촬영물에 치를 떨던 여성들은 피해자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불법 촬영물을 강력히 처벌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은 20만 명이 넘게 서명했다. 태풍 콩레이의 기세가 대단했던 6일에도 주최측 추산 6만 명의 사람들이 혜화역에 모여 ‘불법 촬영 근절’을 외쳤다.
피해자와 연대하기로 한 여자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단계가 있다. 피해자가 더 이상 숨지 않도록,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입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조용하게 지나갔으면 했다’라는 말을 한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가, 침묵해야 하는가. 피해자를 지지한다고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오히려 사건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은 아닌가? 가해자의 이름보다 피해자의 이름이 더 많이 불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 끔찍한 조두순의 범죄사건조차도 처음에는 피해자의 이름으로 호명됐었다.
피해자가 바라는 ‘조용하게’란 결국 침묵과 무관심이다. 피해자는 왜 ‘피해 보상’, ‘가해자 처벌’보다 침묵과 무관심을 더 먼저 바라게 되었나? 개인부터 사회까지 피해자를 집중적으로 린치하기 때문이다. 불법 촬영물이 궁금하다는 개인적인 호기심부터 ‘그러게 네가 조심했어야지’라는 피해자 책망, 가해자를 강하게 처벌하지 않는 사법기관, 범죄 사실과 피해 정도를 소명하기 위해서 피해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까지. ‘차라리 없던 일처럼 조용했으면’이라는 생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결국 아무도 나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와 울분이 피해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법 촬영물이 오히려 범죄의 강력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구 씨가 이번에 ‘여자로서의 삶은? 연예인으로서의 삶은?’이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하다.
피해자에게는 ‘아무도 내가 찍힌 불법 촬영물을 찾아보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없다. ‘내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은 이제야 조금 생긴 참이다. 그게 우리 사회가 지금껏 쌓아 온 신뢰의 수준이다. 지금까지 불법 촬영물은 잔인하게 소비되어왔다. 불법 촬영물 때문에 자살한 피해자의 영상이 아직도 웹하드에 떠돈다. 그 사실을 두고 ‘유작’이라며 잔인하게 조롱하고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웹하드 업체와 디지털 장의 업체가 결탁해 불법 촬영물을 산업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SNS에 불법 촬영물처럼 보이는 영상이 올라오면 ‘이거 너 아니냐’며 피해자를 호명하기 일쑤고, 단체채팅방에서는 ‘우리끼리 보자’며 공유하기도 한다. 피해자가 고통받는 것을 더 이상 두고보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연대가 반쪽짜리가 되지 않으려면, 보통 사람들의 ‘무관심’이 어느 정도 필요한 이유다.
피해자를 위한 연대는 더 시끄러워야 하고, 피해자를 짓밟는 사악한 호기심은 더 조용해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가 영상이 한 번 떠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안 볼 리 없으니, 차라리 사건 자체가 조용해지길 바라는 침묵의 악순환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피해자의 이름이 아니라 가해자의 이름이, 피해자나 가해자의 신상명세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불법 촬영물이 떠도는 사회에 대한 울분이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지금도 피해자와 연대하길 결심한 여자들은 구글과 네이버에 ‘ㅇㅇㅇ동영상’이라는 검색어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는 불법 촬영물로 피해자를 잃는 일이 없도록 인터넷과 시위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제 피해자가 사회를 믿지 못해서 차라리 모두가 침묵하길 바라는 불신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