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축제는 존재를 알리는 장이다. 평소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시달린 성소수자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1년에 몇 차례 안 되는 기회다. 성소수자들은 이날만큼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내며 함께 웃고 즐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지지를 받으면서 자긍심을 얻는다. 하지만 퀴어문화축제는 늘 순탄하지 않았다. 축제의 반대편에는 늘 반대 집회 참가자들의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축제 때마다 성소수자들을 교정의 대상으로 여기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했다. 그 시도는 지난 8일 있었던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절정을 이뤘다.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상징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퀴어퍼레이드 행렬을 막아서며 성소수자들에게 깃발과 피켓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길을 비켜주겠다고 말했다. 존재를 드러내는 자리에서 ‘너희가 누구인지 가려라’라고 강제한 것이다. 성소수자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요구를 들어줬지만 그 이후에도 행진은 순조롭지 못했다고 한다. 깃발이 내려가면 길을 열어주고, 깃발이 하나라도 올라가면 다시 앞을 막는 일이 반복됐다.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무지개가 새겨진 물품을 조금만 높게 들어도 내리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성소수자들의 존재감을 한 톨도 남김없이 지우는데 열중했다.
누구에게도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존재는 긍정과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성소수자들에게 “너희는 죽어야 한다”, “너희 같은 것들은 강간당해야 정신 차린다” 등 저주 섞인 혐오 발언을 쏟아내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에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성소수자들의 존재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걸고 폭력과 억압을 행사할 수 있는지 말이다.
다수의 억압에 의해 소수자의 존재감 표출이 억압받는다면 이들을 보호해야 할 것은 공권력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자 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다. 하지만 공권력은 무력했다. 폭력을 방관하고 방조했다. 경찰은 경고 방송만 거듭할 뿐 반대 세력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소수자들에게 깃발과 피켓을 내리라고 종용했다.
또한 인천 동구청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어 인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가 광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이는 반대 집회가 과격해진 계기가 됐다. 한마디로 인천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려는 시도가 극화됐고 그 시도를 공권력이 묵인·방조한 사건이다.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 수준을 보여준 단면이자 이 나라에서 퀴어가 설 수 있는 자리가 한없이 좁다는 사실을 뜻한다.
‘성소수자 존재의 비가시화’가 계속된다면 퀴어를 위한 나라는 탄생할 수 없다. ‘존재의 비가시화’는 결국 차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 그들이 겪는 수많은 문제는 가려지고 주변화될 뿐이다. 성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는 그들의 개인적인 결함으로 인한 것으로 여겨지며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는 퀴어도 모두 국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가시화할 권리를 확실히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천퀴어문화축제와 같은 사태의 반복을 막을 수 있고 성소수자들이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나라로 변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