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마지막 날 아침, 교체가 확정된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발로 단신 뉴스가 보도됐다. 형사 미성년자인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현행 만 14살에서 만 13살 미만으로 내리는 내용의 형법과 소년법 개정을 올해 안에 추진하도록 국회와 협력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촉법소년’에 해당하면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고 1개월 이내의 소년원 송치와 보호처분 등을 받게 된다. 교육부 관계자는 법 개정 추진 이유에 대해 “과거보다 현저히 청소년의 정신적·신체적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부총리는 지난달 23일 청와대 SNS를 통해 “올 상반기 만 10~13살의 범죄 증가율은 7.9%, 만 13살 범죄 증가율은 14.7%에 달한다”며 “13살 이후 범죄가 급증한다면 형사 미성년자 연령을 13살 미만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007년과 2016년 전체범죄 중 강력범죄 비율이 1.1%에서 1.6%로 늘어난 반면 청소년 강력범죄는 2.2%에서 4.4%로 증가했다”고도 했다. 이 말은 지난 6월 서울 관악산과 노래방 등에서 또래 여고생을 때리고 추행한 14~17살 사이의 중·고교생 9명의 집단폭행 가해 사건을 계기로 소년법을 개정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2건이 55만여 명의 동의를 얻으면서 나온 청와대의 답변이다. 이 말은 또 촉법소년의 강력범죄가 늘어나고 있으니 더 강력하게 이들을 처벌해서 경각심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범죄를 줄여보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잔혹 범죄를 저지른 소년들에 대해 처벌을 강화해달라는 엄벌주의 여론은 소년들의 범죄가 이슈가 될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 3월 발생한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과 9월 발생한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 때도 소년법을 개정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40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SNS와 커뮤니티에서 관련 피해 사실이 참혹한 이미지와 함께 이슈가 되면, 언론이 이 피해 상황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앞다퉈 보도하고, 대중은 가해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공분하면서 소년법 개정으로 처벌을 강화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정치권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중의 여론을 정치로 수렴해 처벌을 강화하는 개정 소년법을 입법하면서 대중의 환영을 끌어낸다. 이런 점에서 소년법이 2007년 이후 11년 만에 처벌 연령을 낮춰 엄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된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2007년과 2018년의 대통령은 시민과 민주주의의 힘을 앞세운 노무현과 문재인이고, 정부 여당은 공히 민주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년 범죄에 대한 처벌은 왜 강화하는 걸까. 첫째, 대중이 피해자의 고통에 자신을 잠재적 피해자로 동일시할 수 있는 매개가 과거보다 늘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의 비윤리성을 확증편향적으로 공유하게 하는 SNS와 커뮤니티는 대중이 자신을 피해자와 동일시하게 되는 중요한 도구다. 지난해 9월 발생한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사람들은 피해자가 무릎을 꿇은 채 폭행당하고 있는 장면이 담긴 영상과 사진을 SNS와 커뮤니티로 공유하면서 공분했고, 범죄 이후에도 가해자들이 죄책감 없는 SNS 댓글을 달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분노를 증폭했다. 물론 이 댓글은 사칭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가해자들은 범죄 이후 바로 소년원에 갇혔기 때문에 휴대전화를 쓸 수 없었다.
둘째, 소년 범죄의 피해자 역시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다는 점도 대중의 공분을 자극하는 요소다. 한국 사회는 한 번 정상성에서 이탈하면 다시 재기할 기회를 주지 않는 곳이다. 이런 사회에서 범죄 피해를 당해 ‘정상성에서 이탈’ 당하는, 그것도 ‘성공’에 도전할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어린 소년 소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셋째, 여기서 ‘순수한 피해자’라는 판타지도 함께 작동한다. 한국 사회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순수한 피해자다움을 갖추길 원한다. 특히 성폭력 사건에서 그러한데, 여기서 ‘순수한 피해자’란 ‘범죄를 당할만한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를 일컫는다. 물론 ‘범죄를 당할만한 잘못’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런 것이 존재하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10대의 어린 소년 소녀는 어른보다 상대적으로 순수하다고 여겨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10대의 어린 소년 소녀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가해를 당한 ‘순수한 피해자’가 손쉽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가해자에 대한 공분은 더 커진다.
넷째,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가 상대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소년법 개정이 11년 만에 민주당 정부에서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상징적이다. 사람들은 재벌가와 정치인에 대한 공정하지 못한 처벌에 더욱더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범죄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여론은 공정하지 못한 처벌에 대한 분노처럼 즉자적인 정의를 이뤄내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대중은 한국의 보수 정부에게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요구하진 않는다. 그들에게 요구하고자 하는 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년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가 어떤 합리적 토론이나 과학적 분석 없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정부가 앞서 내세웠던 촉법소년의 범죄 증가와 청소년의 강력범죄 증가는 의구심이 드는 통계다. 보통 범죄율은 통계적 착시를 방지하기 위해 인구 10만명당 범죄 건수를 바탕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정부가 내세운 통계는 단순히 나잇대와 범죄 숫자만 가지고 집계했다는 점에서 정확성에 의문이 든다. 게다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성명(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성명 ‘형사미성년자 연령을 13세로 낮추는 정책에 반대한다’ )에 의하면, 정부의 집계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도 2008년부터 2016년까지 검찰에서 사건 처리된 전체 소년 범죄자 가운데 14살 미만 범죄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8년 2.8%, 2009년 1.8%, 2010년 0.4%, 2011년 0.4%, 2012년 0.8%, 2013년 0.5%, 2014년 0.04%, 2015년 0.1%, 2016년 0.1% 등으로 지속해서 줄어들거나 많이 증가하지 않았다. 경찰통계에서도 촉법소년의 수는 2012년 1만2799명을 기점으로 해마다 줄어들어 2016년에 6788명에 그치고 있다.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범죄가 줄어들 것이라는 명제는 입증된 적이 없다. 되레 소년에 대한 엄벌주의는 부작용이 더 컸다. 미국에선 미성년자라고 하더라고 특정 범죄를 저질렀거나 재범의 위험이 크면 성인과 동일하게 처벌하는 ‘형사이송제도’를 해마다 확대해왔지만, 이 제도에 의해 성인과 동일하게 처벌받은 소년들이 소년법원에서 보호처분을 받은 소년들과 견줬을 때 재범 범죄의 수가 더 많았고 재범까지 걸린 시간도 더 짧았다. 소년에 대한 엄벌주의가 되레 직업적 범죄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1997년 초등학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카키바라 사건(아즈마 신이치로라는 14살 소년이 사카키바라라는 가명으로 1997년 저지른 연쇄살인사건을 말한다. 동생의 친구인 11살 소년의 머리를 잘라 중학교 교문 앞에 두는 등의 사건을 저질러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도 큰 충격을 줬다.)을 계기로 2000년에 소년형사처벌 연령을 16살에서 14살로 낮췄고, 이후에도 지속해서 소년에 대한 엄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했지만, 이후에 소년 범죄가 줄었다는 보고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소년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를 강화하는, 실효성도 없는 대책을 내놓고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가난에 대한 책임을 빈곤을 낳는 사회 구조가 아니라 온전히 “노력하지 않고 투자하지 않은” 개인에게 묻는 것처럼, 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관계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각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에게 묻는 것처럼, 소년들의 범죄를 낳은 사회의 실패를 논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실효성 없는 대책이 한국의 극심한 서열과 경쟁을 방치해온 교육부에서 나왔다는 점 역시 징후적이다. 이렇게 엄벌로 인해 사회에서 더 가혹하게 축출된 소년 범죄 가해자들은 더더욱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찾아내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데 열을 올릴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이상하지 않다. 그게 지금 한국 사회가 ‘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교육’의 이름으로 이들에게 가르치는, 생존의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