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가 ‘대구 바로 알기’의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 제안자인 서상돈 등을 대구 역사 인물로 부각하는 가운데, 서상돈의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됐다.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항일 운동으로 평가받는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 부사장이던 서상돈이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환을 갚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서상돈은 당시 광문사 사장 김광제 등 16명과 함께 ‘국제보상취지서’를 발표했다.
대구시와 대구시의회는 지난 5월부터 ‘대구 바로 알기’ 범시민 운동 일환으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제안자인 서상돈의 고택은 대구근대골목탐방 코스 중 핵심 코스다.
그러나 8일,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는 서상돈의 친일 행적 의혹을 제기하며 “서상돈은 결코 지역의 대표 문화인물이나 민족운동·국권회복운동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대구·경북 자부심의 원천인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해 널리 알리는 일은 분명 의미가 크다”면서도 “국채보상운동 주역 및 관련 인물 행적에 대한 정확한 검정과 평가도 없이 무분별하게 선양사업이 전개되는데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상돈이 △일제 통감부 주도로 설립한 대구농공은행 대주주이자 감사였던 점 △일제 조선화폐정리사업 중 무이자 거액 대부를 받은 점△한일합병 전후 유력 일본인들과 활발한 경제활동을 벌인 점 △독립협회 간부로 기재된 ‘독립협회연혁략’의 사료로서 가치가 부족한 점 △백성 수탈과 비리 의혹이 있었던 점 등을 제기했다.
우선 서상돈이 1906년 일제 통감부 주도로 설립된 대구농공은행 대주주이자 감사였던 점. 민족문제연구소는 농공은행이 “당시 일제의 지방경제 수탈을 위한 도구였다”며 “그런데도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등에는 농공은행 설립이 오히려 민족경제 수호를 위한 공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성신문(1906.6.22)에 따르면, 당시 서상돈은 1090주를 소유한 최대주주였다. 또 「대구시사 3권 제10편 6장 금융편」(대구시)은 대구농공은행에 대해 “지방농공업 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일제의 대구지역 경제 수탈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1912년에는 일본인들이 조선은행을 설립하여 대구지역에서 영업을 개시했다”고 설명한다.
서상돈이 일제 조선화폐정리사업 중 무이자 거액 대부를 받은 점. 「대구물어」(가와이 아사오)에 따르면, 서상돈은 2년 뒤 백동화로 갚는 조건으로 1907년 초 일본 신화 20만원을 무이자로 대부받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화폐정리사업으로 대한제국 화폐인 구백동화를 회수하는 정책을 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은) 화폐정리사업을 이용해 특혜를 챙겼다”며 “국채보상운동을 부른 국채 증가 배경엔 일제의 화폐정리사업이 있었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한편, 일제 식민정책을 이용해 부를 챙기는 이중적 행보를 취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서상돈의 주요 공적인 독립협회 활동에 대한 의혹도 제기했다. 서상돈이 독립협회 간부였다는 근거는 「독립협회 연구」(신용하)에 실린 독립협회 참여자 명단이다. 그러나 「독립협회 연구」의 주요 사료인 ‘독립협회연혁략’은 저자, 시기 불명 등 사료로서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 그 당시 신문에도 대한계년사, 윤치호 일기 등 어느 곳에도 서상돈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용하 교수조차 (서상돈이) 독립협회 간부가 아니며 만민공동회에 일회성으로 참가한 것으로 추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08년부터 지역 계몽운동에서 서상돈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일제 및 일본인과의 경제활동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름이 등장한다”며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지만, 이후에는 특별한 민족주권 수호활동이 없고 한편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에 충실히 협조해 자신의 부를 축적한 의혹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의혹 제기에 대해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서상돈 개인에 대한 우상화가 아닌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선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자문의원은 “서상돈 선생을 우상화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제안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국채보상운동 취지 등을 밝힌 것”이라며 “(친일 의혹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런 사실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그 친일 행적이 당시 모든 국민이 하던 일반적인 것이었는지 정말 본인 몫을 챙기기 위해 다른 국민을 내모는 친일 행각이었는지 정도에 대한 토론과 평가가 필요하다”며 “서상돈 서생이 1913년 식민지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는데,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