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내 주량이 궁금한 입사이력서 / 박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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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스페셜 <취준진담>편은 취준생이 기업을 평가한 뒤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취준생은 자신이 바라던 회사 문화, 봉급 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느 기업에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취준생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같은 지원자로서 출연자의 말에 공감했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현실에서는 청년이 자신의 합리성을 따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SBS 스페셜 <취준진담>편은 취준생이 기업을 평가한 뒤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취준생은 자신이 바라던 회사 문화, 봉급 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느 기업에도 지원하지 않았다. (사진=SBS 취준진담 갈무리)

얼마 전 이력서를 쓰면서 ‘2018년 신입 공채’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런 것까지 적어야 하나?’라고 되묻게 되는 항목을 봤다.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항목들이었다. 지원자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극히 개인적인 가족 사항, 신체 사항, 주량과 흡연 여부, 종교. 심지어 가족의 학력 수준과 동거 여부까지 적어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3년부터 개인 인권을 침해하는 이력서 항목 삭제를 끊임없이 권고하고, 정부는 학력을 비롯한 개인정보란을 아예 없애는 블라인드 채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와 인권위 노력에도 기업 대부분은 이력서 항목을 바꾸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지원자 입장에서는 인권을 따질 여유가 없다. 이걸 적는 게 맞나, 싶지만 빠짐없이 개인정보를 채워나가는 이유다.

청년 실업률은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자가 쉽사리 이력서를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인권침해를 당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력서 항목 중 인권을 침해하는 항목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출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청년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인, 자신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항을 받아들인다. 불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 삭히는 것은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지원자들에게 인권 침해적인 문항에 반기를 들기보단 순응하게 만들고, 불공정한 기업 관행을 따르게 만든다. 불안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으지 못하고 흩뜨린다. 청년 모두의 불안을 개인의 ‘불만’ 정도로만 치부한다. 개인의 볼멘소리 정도가 되어버린 불안은 우리가 함께 논의하고 개선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이 불안을 해소하지 않으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분노는 생기지만 표출할 방법 없이 사라지게 된다. 사소하게 여겨지는 이력서의 잘못된 관행들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다.

청년들의 불안은 ‘선택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좌절에서 기인한다. 그로인해 청년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의 인권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불만이 불안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공감과 연대다. ‘나만’ 눈을 감으면 문제점은 보이지 않게 된다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 개인의 불만이 아닌 공동의 문제제기이다. 기업의 성찰을 요구하기 위해서 우리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인권 침해 항목을 유지하는 기업에 대해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바뀌지 않는 기업은 도태될 수 있음을 말해야 한다. 변화는 작은 시도들에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