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뢰인 A는 이제 겨우 만 세 살이다. 중미의 작은 나라 온두라스에서 왔다.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엄마 품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던 아기였다. 수년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그녀의 엄마는 자신뿐 아니라 아이까지 죽이겠다는 동거남의 위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온두라스 경찰은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처럼 여성과 아동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않는다. 갱단의 일원인 동거남의 살해 위협으로부터 모녀를 지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A의 엄마는 목숨을 걸고 A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현재 두 모녀의 난민신청이 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난민 자격을 인정받기까지 몇 년이 걸리지만, 자신을 사지에서 구해 낸 엄마 덕분에 A는 호기심 많고 에너지 넘치는 활달한 아이로 자라고 있다.
또 다른 의뢰인 B는 엘살바도르에서 왔다. 2년 전 집을 나설 때 네 살이었다. 조그만 옷가게를 하던 엄마는 갱단의 협박과 갈취에 시달렸다. 상납을 거부하자 어느 날 밤 갱단이 집으로 쳐들어 왔다. B는 엄마와 함께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같이 살던 이모는 갱에게 성폭행당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구출됐다. 이후 다른 도시로 몸을 피했지만, 갱단은 그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 살해 위협을 했다. 경찰에 신고한 것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부패한 경찰은 갱단과 한통속이었다. 결국 B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여덟 살 사촌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현재 가족 모두 난민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미성년자 의뢰인은 과테말라 출신의 C다. 어릴때부터 친척에게 성폭력을 당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먼저 미국에 들어와 일하면서 고향에 돈을 보내던 엄마를 찾아 혼자 국경을 넘었을 때 C는 열두 살이었다. 멕시코 내륙을 거쳐 미국 국경에 이르는 긴 여정 동안 ‘사라진’ 수없이 많은 아이들에 비하면 C는 운이 좋았다. 천신만고 끝에 미국 국경에 도착해 이민국에 체포됐지만, 몇 년이 걸린 지난한 절차 끝에 다행히 체류 허가를 받았다.
나의 미성년자 의뢰인들은 다들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왜 부모가 자신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었는지 이해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지만, 모두들 폭력과 박해 때문에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런데도 나의 의뢰인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부모와 강제로 생이별하는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국경을 넘는 난민 아동들은 부모로부터의 강제 격리 조치라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
4월 트럼프 정부는 불법 이민에 대한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의 한 방법으로 이제부터 국경을 넘는 사람들은 무조건 형사법상 밀입국 혐의로 법정에 세워질 것이고, 동반 자녀는 부모로부터 격리수용 하겠다고 발표했다. 난민은 범죄자가 아니라 국제법상 보호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강제로 분리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이민 구치소나 생면부지의 위탁 가정에 수용되고 있다.
부모와 아이를 격리하는 비인도적인 일은 이전에도 일부 진행되어 왔다. 정부기관의 데이터를 인용한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작년 10월부터 올 4월까지 6개월 동안 국경에서 체포되어 부모와 격리 수용된 아동은 700명이 넘는다. 격리된 아이 중 만 네 살 미만 영유아들도 백여 명이나 된다. 4월에 이 비인도적인 조치를 전면적으로 예외 없이 시행하겠다고 한 이후 부모로부터 격리 수용되는 아이들의 수는 대폭 늘어나고 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약 천 명의 아이들이 부모와 강제로 격리 수용되었다고 <뉴욕타임즈>는 전했다.
박해와 폭력을 피해 온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더 큰 폭력
매일 들려오는 소식이 너무 비참하다. 부모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아이들, 아이들과 떨어지느니 차라리 사지(死地)로 되돌아가겠다고 애원하는 부모들. 오죽하면 국경 근처 텍사스 법원의 한 판사는 법정에서 아이의 행방을 물으며 울부짖는 부모를 보면서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을까.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아이와의 강제 이별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다. 며칠 전 알려진 온두라스에서 온 난민의 자살 소식이 한 예이다. 마르코 뮤노즈라는 30대 남성은 지난달 아내, 세 살 아들과 함께 리오그란데강을 건너 미국에 도착해 난민 신청을 했다. 하지만 격리정책에 따라 그는 아내와 아들로부터 강제로 분리됐다. 항의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텍사스의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민들은 이미 거대한 폭력과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피난처를 찾아온 이들에게 가족과의 생이별은 감내하기 힘든 고통과 상처를 남길 것이다. 또한 이민국 감옥에 구금된 미성년 아동들이 겪는 학대와 비인도적인 처우, 성폭력 등은 오래전부터 인권단체들이 항의해 온 일이다. 앞으로 더 많은 아동들이 부모로부터 분리, 구금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노골적인 반이민 정책과 선동을 해왔지만, 특히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는 이번 조치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반인륜적이고 비인도적인 만행이다. 유엔이 나서서 국제법 위반과 아동인권 침해라고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정부는 국경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꿈쩍도 안 하고 있다.
그런데 난민에 대한 냉대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2017년 4월 기준 3.9%로 전 세계 난민 인정률 38%에 한참 못 미친다. 특히, 최근 예멘에서 난민 470여 명이 제주에 도착해 난민 신청을 하면서 다시 한번 난민 처우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난민협약 하에서 난민들의 생계지원을 해야하는 정부는 도리어 난민 신청자들의 거주지역을 제주로 제한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거주지역 제한은 난민 신청자에게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국제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난민 지원 체계가 없는 제주에 난민들을 방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법무부는 더 많은 예멘인들의 입국을 막기 위해 아예 예멘을 무사증입국 대상 국가에서 제외했다. 예멘은 2015년 시작된 내전으로 이미 19만 명이 피난처를 찾아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지난 2015년 터키의 한 휴양지 해변에 싸늘한 시신으로 떠밀려온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모습은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다. 아일란은 가족과 함께 내전에 휘말린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가던 중 배가 뒤집혀 짧은 생을 비극적으로 마쳤다. 다섯 살인 아일란의 형도 함께 변을 당했다.
아일란처럼 피난처를 찾다가 목숨을 잃은 수많은 난민에게 보내는 연민의 반의반이라도 살아있는 난민에게 보낼 수 없는지 묻고 싶다. 요즘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난민은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일란의 죽음에는 아파하면서 왜 수많은 아일란과 같은 난민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는 눈을 감는지, 난민들이 겪는 고초는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지난 4월 27일 열린 판문점 회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두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가뿐히 넘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인위적인 선을 땅에 그어 놓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가. 불행히도 인위적인 선은 남북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서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경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인위적으로 그어진 선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인간에 대한 폭력과 학살을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경은 인간의 기본권보다 더 소중한 신성불가침한 것인가. 국경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몽상에 불과할까. 자본은 커다란 제약 없이 전 세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에서 왜 생존을 위해 피난처를 찾는 난민들에게 국경은 그렇게 가혹하게 닫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