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8년. 1980년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김선옥 씨가 조사 과정에서 담당 수사관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마침내 대중 앞에 나선 김선옥 씨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이제 그녀의 증언을 시작으로 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10대 여고생을 포함해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증언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은 폭도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학살했다. 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해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혹한 ‘인간사냥’에 맞서 처절히 저항했던 광주는 열흘 동안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모든 전쟁에서 빠짐없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광주에서도 예외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피해의 구체적인 실상이 세상에 드러나는데 무려 3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광주에서 자행된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들으면서 나는 바로 얼마 전 지구 반대편 미국의 한 법정 로비에서 울음을 터뜨린 여성들을 떠올렸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빌 코스비. 한국에서도 방영된 <코스비 가족> 시트콤에서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이미지를 구축해 ‘국민 아빠’라는 애칭을 얻은 그가 4월 26일 펜실베니아주의 한 형사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2004년 1월, 당시 템플대 여자농구팀 코치였던 안드레아 콘스탄드라는 여성을 코스비가 성폭행했다는 혐의에 대해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린 것이다. 진로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코스비를 방문한 콘스탄드는 그가 건넨 알약을 먹은 뒤 몸을 전혀 가눌 수 없게 되었고, 그런 자신을 코스비가 성폭력을 했다고 고소했다. 코스비는 서로 합의 하에 맺은 관계라고 반박했지만, 배심원단은 코스비가 아닌 콘스탄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코스비에 대한 유죄 선고가 내려지자 여성들은 법정 로비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코스비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성들이다. 이들 또한 콘스탄드처럼 코스비로부터 건네받은 약을 탄 음료나 알약을 먹은 후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공소시효가 끝나 코스비를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이 여성들은 이번 재판을 자기 일로 생각하고 코스비의 유죄를 끌어내기 위해 같이 싸우면서 그 과정에서 ‘국민 아빠’인 코스비 지지자들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을 같이 감내해왔다. 이들이 흘린 눈물은 마침내 자신들의 말을 세상이 믿어 주었다는 감격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며 코스비 변호인단이 항소할 뜻을 분명히 해 당분간 법정 싸움이 계속될 전망이지만, 유죄가 확정되면 코스비는 최소 15년에서 30년 형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80세인 그가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듯하다. 법적인 과정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코스비의 ‘국민 아빠’ 가면은 벗겨졌고 ‘상습 강간범’의 추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지난해 하비 와인스틴에 이어 이번에는 코스비를 영구 제명한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코스비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여성은 60여 명에 달한다. 그녀들에 따르면 코스비는 1960년대 중반부터 50여 년 동안 상습적으로 성범죄를 벌여왔다. 피해 여성 중에는 당시 10대였던 사람도 있고, 자신이 당한 일을 폭로하기까지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던 이도 있었다. 코스비에 대한 폭로는 오래전부터 조금씩 새어 나왔지만, 할리우드의 실세 와인스틴의 경우처럼 코스비의 권력에 기댄 침묵의 카르텔에 의해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계속 외면당해 왔다.
안드레아 콘스탄드도 처음에는 다른 여성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코스비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사라질 뻔한 사건은 2014년 후반부터 더 많은 여성들이 코스비에게 당한 성폭력을 폭로하고 나오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사건 조사가 다시 시작됐고, 공소시효 만료를 불과 한 달 앞둔 2015년 말 검찰은 전격적으로 코스비를 기소한다.
하지만 이후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작년 6월 배심원단은 만장일치 평결을 내리지 못하고 심리 무효를 선언했다. 새 배심원단이 꾸려져 재판이 재개되었지만, 남자 7명, 여자 5명으로 구성된 배심원 중 단 한 명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코스비에 대한 유죄 평결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상황은 급속하게 변했고, 결국 코스비는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작년 6월 첫 번째 재판이 심리 무효로 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미투 운동이다. 코스비는 지난가을 미투 운동이 시작되고 나서 형사재판에 회부된 첫 번째 유명인사이다. 미투 운동이 가져온 변화의 바람이 어떻게 보수적인 법원에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작년과 올해 두 차례 재판에서 제시된 사건 증거 자체에 큰 변화는 없었다.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처럼 이번 사건도 배심원들은 직접적인 증거 없이 여성과 남성의 상반된 주장을 듣고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나 판단을 내려야 했다. 첫 번째 배심원단과 달리 두 번째 배심원단은 막강한 권력과 명망을 지닌 코스비가 아닌 여성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여성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기 시작하고,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투 운동의 소중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코스비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의 장벽을 넘어 성공한 극소수 흑인 중 하나이다. 흑인으로는 최초로 에미상을 수여했고, 역사상 처음으로 미 주류 방송에서 중상층 흑인 가정을 다룬 <코스비 가족>의 주연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명성에 걸맞게 그동안 그가 쌓아온 부와 권력과 인맥은 어마어마하다. 이런 힘 덕분에 그동안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의 권력에 맞서 그리고 여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연대한 여성들이 있었기에 승리는 가능했다. 이 여성들 말대로 이번 재판 결과는 모든 성폭력 생존자들이 거둔 소중한 승리이다.
다시 광주로 가보자. 코스비 사건 피해 여성들이 겪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광주 여성들의 목소리도 세상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 탓이 아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세상에 전하려고 해왔지만, 이 사회는 여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윤청자 5월민주여성회 부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왜 그동안 여성들의 피해를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새삼시럽다. 우리가 지금껏 말을 안 혔겄어. 전체 투쟁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우리 얘기만 내세우질 못한 거지”라고 응수했다. 계엄군에게 성범죄를 당한 여성을 가족의 ‘수치’로 여겨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설마 공수부대가 그렇게까지 했겠느냐며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은 5.18단체 관계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모두 여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미투 때문에 38년 만에 용기를 냈다는 김선옥 씨 말처럼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은 곳곳에서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내고 있다. 용기 있는 증언에 뒤늦게나마 5·18 당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과 성고문 등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와 가해자를 처벌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계엄군이 저지른 성범죄도 5.18 진상규명 특별법 조사 대상에 포함하자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기존 ‘사망, 상해, 실종, 암매장 사건 및 그 밖의 중대한 인권침해사건 및 조작·의혹 사건’에 여성에 대한 성범죄 사건을 추가로 명시 하자는 것이다. 국방부도 자체 진상조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정말 우리 사회가 마침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들어보자. 가해자가 누구이든 간에 피해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성폭력 범죄에서 특히 가해자가 국가 권력일 때 피해자들은 더 오랫동안 숨죽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학살의 책임자와 성폭력 가해자들이 버젓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5월 광주의 상흔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고통이다. “지금도 군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잘 보지 못한다”는 김선옥 씨 말처럼 피해 상황조차 제대로 밝힐 수 없었던 국가 폭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제라도 국가 권력이 저지른 성폭력과 성고문 등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가해자와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반(反)인도적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의 기본 원칙이다. 국가 폭력이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반(反)인도적 범죄이다. 더 늦기 전에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가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마침내 세상이 자신들의 말을 믿었다고 코스비 유죄 평결에 눈물을 흘리던 여성들처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은 광주항쟁의 생존 여성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