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현재 지방대 철학과를 다니고 있는 예비 실업자, 취업란에 마땅히 쓸 것 하나 없는 한국의 평범한 이십대들 중 하나로, 이런 자기 팔자를 어떻게든 뜯어 고치려고 노력 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욘수’가 격주 수요일마다 대화로 풀어가는 철학 이야기를 연재한다.]
1.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그 도입부
나: 지난번엔 신비주의와 현실주의를 비교하며 그 둘을 설명했지? 이번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해서 비교하며 설명할 거야.
남: 신비주의랑 현실주의가 무슨 의민지는 지난번에 너한테 설명을 들어서 알겠는데 이상주의는 대체 뭐야?
나: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태도를 말하는 건데, 언뜻 듣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문제가 참 많은 논리야.
남: 어째서?
나: 그건 다음 회에 이상주의 현실주의 논쟁을 하면서 알아보자. 오늘은 그 전에 이상주의자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 중 긍정할만한 점, ‘너 자신을 알라’ 의 진정한 의미를 너한테 알려줄게.
남: 아! 나 ‘너 자신을 알라’가 무슨 뜻인지 알아, ‘네 주제를 알아라’ 랑 같은 말 아니야?
나: 사람들이 그런 의미로 오해를 많이 하지. 하지만 그건 실제 의미와 전혀 다른 말이야. 원래 의미는 ‘모르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야.
2. 모르는 나를 알아라. (예시를 다 읽기 귀찮으면 결론 부분만 읽으세요. 창 닫지 마시고)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자신이 지금껏 모르면서 판단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하는데 목적을 가진다. 아래 예시는 소크라테스가 경건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에우튀프론을 어떻게 몰아가는지 보여준다.
에우튀프론: 경건함이란,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치는 일을 기소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가? 나는 자네가 왜 그 행위를 경건하다고 생각했는지를 묻는 것일세.
소크라테스: 경건함은 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신들도 저마다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를 두고 싸우지 않나? 그런데 자네가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무엇이 올바른지도 모르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 올바른 것이 신의 사랑을 받는 일을 하는 거라면 그 일은 올바르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신의 사랑을 받아서 올바른 것인가? 만약 신의 사랑을 받아서 올바른 것이라면 신의 사랑이 올바름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신, 그치들은 자기들이 일으킨 천재지변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깔깔 웃어대는 존재들인데? 그런 존재들에게 사랑받는 행위가 과연 올바른 행위라고 할 수 있나?(그리스 신화의 인격적인 신에 한정해서 하는 말) 그럼 신이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그 무언가는 신이 단순히 사랑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올바른 것이어서라고 생각하면 되나?
소크라테스: 그렇다 해도 말이지, 자네의 판단 기준인 경건함은 올바른 것 중 하나일 뿐이네. 즉 용감함, 타인을 보살피는 행위들도 올바른 것이지. 그럼 경건함에 따라 자네의 아버지를 고소하는 행위와 아버지를 보살피는 행위 이 둘 중 어느 것이 자네의 지금 상황에서 올바른 행위인가? 그것을 자네가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준만으로 판단할 수 있겠나?
에우튀프론: 저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속마음: 아 ㅅㅂ 몰라 내 마음대로 할래. 늙은이가 말이 더럽게 많네)
-‘에우튀프론’ 발췌 변형-
나: 예시 속 에우튀프론은 소크라테스한테서 도망쳤지만, 이 사례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있어.
남: 어떤?
나: 다른 사람, 또는 스스로의 질문에 묻고 답해보며 내 생각, 판단 기준이 정말로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의심해보라는 것. 소크라테스와 만나 그의 계속되는 질문에 묻고 답하기 전까진, 에우튀프론은 자신이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아버지를 고소하는 행동에도 거리낌이 없었지.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나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에 대해 설명하려다 보니, 자신은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신을 알게 된 거야. 자신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에우튀프론은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준을 설명할 수 없었고 도망쳐버렸어. 하지만 에우튀프론이 도망쳤더라도 소크라테스와의 문답법을 통해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다음에 판단할 때는 판단에 더 신중해지겠지.
남: 판단에 더 신중해진다니?
나: 내가 한 판단이 정말 옳은 판단인지, 판단하기 전에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는 거야.
3. 판단하기 전, 먼저 자신의 모름을 알아라.
두 굴뚝 청소부가 굴뚝을 청소했다.
굴뚝을 청소한 뒤, 한 청소부의 얼굴은 검어졌지만
다른 청소부의 얼굴은 여전히 하얬다.
청소가 끝난 뒤, 얼굴이 검어진 청소부는 자신의 얼굴을 씻지 않았다.
왜냐하면, 얼굴이 하얀 청소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도 하얗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검어진 굴뚝 청소부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판단하지 않고
상대의 얼굴을 보고 판단했기에, 이런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탈무드 발췌, 변형-
나: 이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내 얼굴이 검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만 알 수 있어. 스스로의 얼굴이 검은지 아닌지, 즉 자신이 생각이 옳은 생각인지 잘못된 생각인지는 스스로 묻고 답하면서만 알 수 있다는 거야. 자기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자문자답만이 나도 몰랐던 나의 검은 얼굴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거지. 이런 문답과 자기 인식이 실생활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내 일상을 통해서 보여줄게.
4. 남을 모르는 나를 알아라.
엄마: 야! 밖에 좀 나가라! 넌 애가 도대체 왜 밖에 안 나가고 만날 집구석에 처박혀 있냐!
나: 아 쫌! 내가 알아서 한다고! 내가 초딩이야? 어?
엄마: 너 씨 오늘 안 나가면 용돈도 없을 줄 알아. 버스 타고도 20분 넘게 걸리는 대학 한 번 걸어서 가볼래?
나: 아 씨 치사하게 진짜 돈 갖고 협박 좀 안 하면 안 돼? (침대에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왜 엄마는 엄마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내게 강요하는데!
엄마: 시끄러! 내가 해주는 밥 먹으면 내 말에 토 달지마!
나: 그냥 예시만 보면, 부모 자식 간의 평범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이 싸움도 ‘나’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해서 일어나고 있어.
남: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니?
나: 엄마를 모르는 자기 자신을 ‘나’가 알지 못하는 거지. 엄마는 젊을 때 여행을 많이 다니고, 복수 전공을 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야. 젊은 나이에 다양한 경험을 직접 찾아서 했던 만큼, 같은 또래들에 비해 더 많은 추억을 가졌지. 엄마는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 도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어. 그래서 ‘나’도 아직 20대일 때 밖에 나가서 더 많은 경험을 하길 바라는 거지. 그래서 약간의 조급함을 가지고 ‘야! 밖에 좀 나가라! 넌 애가 도대체 왜 밖에 안 나가고 만날 집구석에 처박혀 있냐!’ 같은 말을 ‘나’한테 한거야.
그리고 엄마는 주말에도 무기력하게 방 안에 있는 나를 보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어. ‘나’가 어릴 적에 했던, 엄마의 주입식 교육 때문에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엄마는 용돈을 가지고 협박을 해서라도 ‘나’가 밖에 나가길 원하는 거야. 밖에 나가서 여러 경험을 해보면 ‘나’가 다시 의지를 가지고 원하는 것을 찾고, 노력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예전처럼 엄마가 내게 또 참견하려 한다고 생각할 뿐이지. ‘내가 엄마의 의도를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는 거야.
남: 어째서 ‘나’는 그걸 모르는 거지?
나: 엄마를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지금 엄마가 어떤 생각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의 행동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거야.
엄마가 또 내게 참견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판단을 ‘나’가 엄마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계속하게 되면서, 나와 엄마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겠지. 엄마가 예시의 것들과 비슷한 말들을 할 때마다, 엄마가 내게 악의를 가지고, 또는 내게 해를 가하려고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만약 ‘나’가 엄마를 모르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엄마의 의도를 알려고 노력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를 염려해서이고, 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어쩌면 똑같은 말을 들어도 이제는 엄마가 또 내게 참견한다고 판단하지 않고,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지.
엄마를 모르는 나를 알게 되면서, 엄마에 대한 나의 판단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엄마에 대해 나는 좀 더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는 거지.
이렇게 남을 모르는 나를 알게 되고, 남이 말하는 의도를 이해하게 되면 나는 어째서 이런 말을 하고, 또 상대방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둘을 이해할 수 있게 돼. 나를 알고 남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 감정만을 고집하게 될 일도 없겠지.
5. 어쩌면
나: 만약,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남을 모르는 나를 알고, 남을 이해하려고 하는 ‘나’가 다수가 되는 사회라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좀 더 올바른 판단을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남: 굉장히 이상적으로 들리는걸?
나: 그렇게 이상적인 것만도 아니야. 나는 이런 방법을 실천해서, 엄마와의 갈등을 실제로 해소했는걸. 너도 나처럼 한 번 해보는 거 어때? 그럼 미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미워하게 될 일이 없어져. 오히려 ‘나’와 이전에 내가 미워하던 ‘남’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지.
내가 나와 남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뭔가 딱히 대단한 생각을 해야 할 필요 없어. 내가 행동하기 전에 과연 내 생각이 맞는지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내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먼저 알아볼 것,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내가 정말 저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아는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나는 모르는데 그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닌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이 옳은지 의심해볼 것.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돼.
6. 나 자신을 알라
나: 결국 ‘나 자신을 알라’는 먼저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본 뒤, 지금까지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 또는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스스로 의심해보라는 거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스스로 해봐야만 지금까지 나의 입장에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되니까.
그렇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몰랐던 나’를 인식할 수 있게 돼. 마침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거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스스로 알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스스로 자기 생각이 옳은지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판단할 때도 자신의 판단이 과연 옳은지를 언제나 객관적으로 의심할 수 있어. 이런 의심만이 나를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