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만드는 눈으로 덮힌 미국 노스다코타주의 황량한 들판을 차로 달리고 있었다. 윌리스턴이라는 마을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곁에는 석유 시추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다. 루이스 어드리크(Louise Erdrich)의 소설 <사랑의 묘약>의 첫문장이 생각난다. “…… 오일붐이 일어난 노스다코타주 윌리스턴의 꽉 막힌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중심가를 걷던 한 원주민 여성은 백인 남자의 가벼운 섹스 상대가 되었다. 그는 눈 쌓인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려했으나 결국 얼어죽었다.
작년에 노스다코타주로 이사를 왔다. 집을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바로 오일붐이 한창 일던 시절 밀려들던 사람들 때문에 지어놓은 집이 많았기 때문이다. 면적은 남한의 두 배 가까이 되지만 인구는 75만 명이 조금 넘으니 아무리 인구가 늘어나도 땅은 남아돈다. 집값도 싸고 실업률이 낮아 최근에는 삶의 만족도가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명암이 있다. 2017년 완공되어 지난해 5월에 첫 운송을 시작했다. 노스다코타를 시작으로 사우스다코타, 아이오와를 거쳐 일리노이에 이르는 긴 송유관이다. 송유관이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에 걸쳐있는 원주민 보호구역을 지나가면서 이 송유관 건설 문제는 원주민들의 삶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미주리강과 오아히 호수를 경유하는데 특히 이 오아히 호는 원주민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었기 때문이다. 기름이 유출되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또한, 원주민 성지와 문화유적들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원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환경운동가들이 연대하며 이 투쟁은 미국을 넘어 외국에도 알려졌다. 물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공권력은 2016년 11월 물대포를 쏘며 진압하기도 했다. 이곳의 겨울 날씨를 감안하면 ‘살인적’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밀양송전탑 건립을 두고 벌어진 투쟁에서 보았듯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중앙이라는 물리적 장소에 지배되기 쉽고 자본의 위협에 훨씬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리된 삶은 배려라기보다 배척으로 향하기 쉽다. 미국의 원주민 보호구역이 그렇게 모순된 장소이다. 치페와 족과 독일계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어드리크는 그 자신도 원주민 혈통이다. 미네소타에서 태어나 노스다코타의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서 성장했기에 그의 소설은 대부분 북미의 원주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는 미국 원주민 문화 르네상스Native American Rennaisance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문장에서는 오도독오도독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남자들의 뼈를 갈아 차에 타서 밤에 마시고 싶다” (<사랑의 묘약>, 115쪽)
소설 <사랑의 묘약>에는 알코올 중독이거나 범죄자로 감옥을 들락거리는 삶, 모두 다르게 생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 워싱턴 D.C를 들락거리며 정치활동을 하지만 결국 좋은 원주민은 죽었거나 말에서 굴러떨어질 뿐이라는 자조적 농담을 뱉는 원주민 사회의 인사 등 다양한 인물이 얽혀있다. 미국 정부의 정책을 비꼬는 작중 인물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웃프다’. “나는 미국의 인구조사원을 내 집에 들이지 않는다. 뭐, 지금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도 좋다. 그들은 우리를 헤아릴 때마다 제거할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357쪽)
한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 원주민은 자신과 닮은 적의 얼굴에 당황한다. “치페와족을 닮은 아시아인의 처진 눈, 그녀가 피를 흘렸다.” (227쪽) 나와 닮을수록 가까운 정서를 느낀다. 이는 반대로 나와 다르게 생기고 인간과 다른 모습을 가진 생명체일수록 배척하기 쉽다는 뜻이다. 남자와 남자 아닌 사람, 한국인과 한국인 아닌 사람, 인간과 인간 아닌 생명 등으로 분리는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번에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 대해 나는 좀 비뚤어지게 바라보는 입장이다. 상 자체야 어느 정도 정치적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가진 문제점이 가려지진 않는다.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의 연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좋은 점이 많은 영화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는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선’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절대적 지배자와 악이 있지만, 약자와 소수자는 원래 서로 잘 연대하고 선한 인물인 것일까. 지배와 피지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획을 나누는 이 사회의 권력관계를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는 방식은 매우 순진하다. 이처럼 사랑과 정치에 대한 단순한 시선이 몹시 거슬렸다.
특히 나의 몰입을 방해한 장면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고양이를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 속에서 고양이는 끔찍한 방식으로 사라졌다. 고양이에게 벌어진 비극에 대해 영화 속 인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대인배’처럼 행동한다. 정말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극중 인물들(인간을 닮은 양서류 ’인간’을 포함)간의 관계에 비해 고양이라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영화가 무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타자와의 소통, 경계 없는 사랑을 다룬다는 면에서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경계를 넘어 사랑과 존중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생명의 존엄이 ‘인간과 가깝게 생길수록’ 그 무게감을 가진다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모양’을 옹호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이 과연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대한 분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오간다. 2000년대 초반 지율 스님이 KTX건설을 위해 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 공사가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단식 농성을 벌인 적 있다. 이 사건은 ‘도롱뇽 사건’이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고작 도롱뇽 살리겠다고. 도룡뇽은 상징이다. 도롱뇽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물, 흙, 동물 등과 연결된 존재라고 여기기보다 ‘고작 도롱뇽’이라는 따옴표 안에 갇혔다. 법적으로 패소했지만 지율 스님이 사회에 남긴 화두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대하여.
기독교의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불교의 자비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넘어선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을 일컫는다. ‘나’와 ‘타’의 관계이다. 인간은 관계적 동물이며 동시에 개별성을 가진 ‘유아독존’의 존재다. 관계와 독존 사이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흐르며 ‘나’와 ‘타’도 꾸준히 서로가 서로에게 흐른다. 사랑이 전이되듯 고통도 전이된다. “우리가 하나의 형상인 외로움을 나누었기에“ (<사랑의 묘약>,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