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격주 수요일마다 연재하던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는 이번 글부터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연재합니다.]
지난 칼럼, ‘디지털 위험사회와 시민의 책임’(2월28일자)에서, 우리에게 당면한 디지털 사회의 위험과 그 근원을 다룬 바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이번 칼럼의 주제는 지난번 주제와는 다른 분야에 관련된 내용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며칠 사이, 전 세계를 강타한 ‘페이스북 쇼크’는 다시 ‘디지털 위험사회’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이번 사태의 파장이 실로 만만치 않다. 지난 미국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선거대책본부로부터 유권자 성향 분석을 의뢰받은 데이터 분석 업체, ‘캠브리지 애널리티카’(CA)는 5천만 명이 넘는 페이스북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고 선거에 활용했다. 내부고발자 크리스토퍼 와일에 따르면, CA는 어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정보에 잘 동요되고 각인되는지 분석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권자 성향 분석은 트럼프 선거캠프에 즉각 활용됐다. 페이스북은 2015년경 CA의 불법적 개인정보 수집을 감지하고도 방치한 책임, 결과적으로 사용자 개인정보 관리 체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번 사태로 페이스북 시가 총액이 하루 만에 367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0조 원 증발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정보유출과 가짜뉴스의 페이스북
페이스북은 이미 2016년 대선 당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바 있다. 그중 하나는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에 페이스북 연루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해 미국 의회 청문회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2015년부터 8만 건에 달하는 러시아의 정치적 게시물이 1억2천600만 명에게 무차별적으로 전달됐다고 한다. 선거에 영향을 줄 만한, 특정한 정치적 목적과 의도를 가진 게시물이 페이스북 플랫폼을 통해 대량으로 유포됐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아울러 페이스북은 미국 대선 당시 ‘가짜뉴스’가 점령한 SNS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를 지지한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IS에 무기를 팔았다”와 같은 가짜뉴스가 페이스북을 통해 순식간에 퍼졌다. 오죽했으면 페이스북이 아니라 페이크북이라고 했겠는가. 페이스북 이용자 중 일부는 이런 가짜뉴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특정 후보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 대선 과정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3개월 동안의 가짜뉴스 상위 20개는 같은 기준 사실뉴스보다 많은 공유가 이루어지고 댓글이 달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을 뒤엎고 대선에서 승리한 배경에 이 같은 가짜뉴스를 이용한 ‘SNS 선거심리전’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꽤 설득력 있게 제시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전직 페이스북 개인정보보호 책임자였던 샌디 파라킬라스는는 지난해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페이스북이 스스로 악성 콘텐츠를 검열할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하며, “내부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데이터 남용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사용자의 데이터 수집을 더 우선시하는 회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부정적인 언론 보도나 당국의 조사가 없는 한 페이스북은 사용자 개인정보보호에 나선 적이 없다고 했다. 이 같은 발언은 페이스북이 가짜뉴스로 곤경에 처한 이후 고안한 ‘신뢰프로젝트’ 발표 직후에 나온 것이어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
‘페이스북 쇼크’, 예비된 재앙!
문제는 이 같은 ‘페이스북 쇼크’가 돌발적이거나 우연히 일어나는 사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태는 페이스북이 가진 태생적이고 근원적인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세계 최대 SNS인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광고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흔히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점은 페이스북이 공짜라고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공짜처럼 보일뿐이다. 페이스북은 사용자들이 좋아할 만한 기구를 갖추고 놀이터를 무료로 개방한다. 사용자들은 중독성 있는 놀이기구를 공짜라고 여기며 즐긴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놀이터에 남긴 흔적은 고스란히 페이스북의 수익으로 연결된다. 접속 통계와 ‘좋아요’는 사용자 성향을 분석하는 알고리즘의 재료가 된다. 사용자가 남긴 흔적은 비즈니스 모델로 최적화된다. 페이스북은 지난해 연매출 400억 달러(약 42조 원)를 돌파했고, 이 중 대부분 수익이 광고를 통해 창출됐다(2017년 기준, 87%).
전 세계 21억 명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은 거대한 광고시장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야 하는 사실은 페이스북의 고객은 사용자가 아니라 광고주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페이스북에 사용자는 어떤 대상일까? 사용자는 광고수익을 얻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추적하여 그들에게 최적화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한다.
‘좋아요’와 같은 중독성 강한 장치를 교묘히 배치하여 사용자를 지속해서 유인하고 붙들어 둔다. 페이스북은 이렇게 모인 사용자를 광고주에게 건네주며 수익을 올린다. 사용자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채 페이스북에 자발적으로 데이터와 콘텐츠를 갖다 바친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는 오롯이 페이스북의 자산이 된다.
그러하기에 이번에 문제가 된 5천만 계정의 개인정보 유출은 페이스북 시스템에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태다.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언명은 모순어법에 가깝다. 개인정보를 철저히 보호하면 할수록 페이스북의 수익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용자가 제공하는 개인정보를 비즈니스 모델로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데이터 기반 플랫폼이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유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 ‘페이스북 쇼크’는 단지 개인정보 관리 소홀에서 나온 이례적인 사태가 아니라 페이스북에 내재한 근원적인 재앙이라고 보아야 한다. 페이스북이 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사용자를 유인하여 막대한 매출을 올린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들은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각 나라의 공공재인 인터넷을 사용하여 거대한 수익을 창출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영국이나 EU(유럽연합)에서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거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움직임을 지속해서 펼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조세 조약이나 세법을 악용해 조세 회피를 꾀하고 있는 이들 글로벌 IT기업을 대상으로 이른바 ‘구글세’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버 자율주행자동차, 보행자 사망 사고
그런가 하면 미국 시간으로 지난 18일에는 세계 최대 차량 호출 서비스 업체 우버의 자율주행자동차가 시험 운전 중에 길을 건너던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우버의 차량은 자율주행 모드였다. 2016년 테슬라 자동차의 사고는 책임이 운전자에게 있었던 반면 우버의 사고는 자율주행자동차 결함에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비교될 수 없다. 이번 사고는 자율주행 모드 자동차가 공공도로에서 보행자를 숨지게 한 최초의 사고로 기록될 것이다.
이 사고를 둘러싸고 관련 업계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우버는 자동차 회사인 볼보의 책임을 묻고, 볼보는 자율주행에 사용된 기술이 자사의 것이 아니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인간 운전사보다 안전하다고 주장하던 기술 업계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실제로 자율주행자동차 연구 및 개발에 세계적 명성을 지닌 카네기멜론대학 라지 라지쿠마 교수는 자율주행자동차의 오류는 휴대전화에 생기는 오류와 다르게 사망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며 기술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자율주행자동차 경쟁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율주행자동차는 미래 기술의 핵심으로, 거대 기업들이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분야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 차량 공유서비스 우버, 전기자동차 업체 테슬라 등은 이 기술 개발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고 시험 주행을 지속해서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자율주행자동차는 관련 법규의 미비, 책임 소재 불분명, 윤리적 판단 문제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안전성에 관한 논란을 여전히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상용화될 것처럼 그토록 떠들어대던 자율주행 기술이, 이처럼 당면한 안전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다면 과연 그 기술을 신뢰할 수 있을까? 기술은 제아무리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무오류일 수는 없다. 만에 하나의 오류 가능성이 인간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상황으로 연결된다는 점은 자율주행자동차가 지닌 치명적인 한계다. 예측 불가능하거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는 어떠한가? 우버의 자율주행 무인 택시를 이용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자율주행 자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온다면, 운전을 전혀 못하는 탑승객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디지털 네트워크의 마비, 수신 체계의 교란, 도시 교통 체계의 조작과 같은 방식으로 테러가 이루어진다면 자율주행자동차는 그야말로 살상 무기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우리가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기술의 위험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다른 문제는 이 같은 자율주행자동차 사고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다. 몇몇 언론에서 이번 사고에 보인 반응은 말 그대로 가관이다. 이들은 인명 사고의 안타까움이나 사태의 심각성보다는 자율주행자동차 연구에 제동이 걸릴까 염려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들 기사는 여지없이 한 해 동안 인간 운전사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인명 사고가 일어나는지를 견주어 예를 들었다. 시험 운행조차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자율주행자동차 사례를 인간 운전사 상황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임에도 언론이 이 같은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따로 있다. 기술 개발에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자한 기업은 자율주행자동차 개발이 더뎌질 경우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언론은 바로 이들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를 내보냈을 뿐이다. 이들에게 첨단 기술의 위험성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지털 위험사회
20세기 기술산업 문명에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자크 엘륄은, 『기술의 역사』를 통해 지난 세기에 이미 기술이 인간의 통제 영역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엘륄은 이를 ‘기술의 자율성’이라 불렀다. 그가 말하는 ‘기술의 자율성’은 일차적으로는 기술 발전의 내적 진화에 따라 인간의 제어를 뛰어넘어 발전하는 기술의 속성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러한 기술에 예속되어 자율과 자유를 상실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찰한 개념이기도 하다. 엘륄에 의하면, 기술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구성원인 인간은 ‘기술의 자율성’에 완전히 적응해(마비되어) 기술이 만들어낸 재앙이 드러남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과 재앙에 순응하게 되는 과정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론’을 통해 말하고 있는 바와 맥을 같이 한다.
엘륄은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대다수 기술사회의 구성원들이 기술발전에 대해‘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엘륄이 살았던 지난 세기에도 기술의 진보는 그 자체로 선(善)이었으며,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나 이단자로 취급받았다. 이미 그 시절부터 기술은 종교가 되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해 왔다.
엘륄은 이러한 흐름을 완전히 바꿀 만한 대안은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그는 기술의 폭주를 막아낼 대책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의 자율성이 더 극대화될수록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엘륄은 인간이 이러한 파국으로 치닫는 기술 진보를 막아내기 위해 얼마만큼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지에 대해 고뇌했다.
어찌 보면 수동적이거나 비관적일 수 있는 엘륄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디지털 위험사회로 이미 진입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태도’로 다가온다. 기술은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굳이 ‘자율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간의 통제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까마득한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기술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자본의 폭주는, ‘삶을 위한 기술’의 가능성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자세는 엘륄이 강조했던 것처럼 바로 우리 자신이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기술 신화에 더 이상 현혹당하지 않아야 한다.
제2의, 제3의 페이스북 쇼크는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우버의 자율주행자동차 시험은 이번 사망 사고로 잠시 주춤하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개될 것이 확실하다. 기술의 속성을 지배하는 자본이 건재하는 한 기술의 질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정말 궁금한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강력한 위험 신호가 찾아와야 이러한 질주가 멈출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며칠 전 타개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경고한 것처럼 지구를 떠나서 새로운 삶의 근거지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재앙을 막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여 아주 비현실적이고 비관적일지 모르지만, 자크 엘륄이 제시했던 것처럼 우리가 지금과 같이 살아서는 다가올 기술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기술사회의 위험을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렇게 기술을 통한 기술사회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특별한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우리에게 닥친 미증유의 사태를 분명하게 직시하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