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차만별이에요. 방송사마다 다 다르고, 라디오, 텔레비전 또 달라서 뭐라고 딱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일하는 시간도 다르고, 원고료도 다르고 천차만별이죠. 그래서 평균으로 말하기도 어려워요”
올해 17년 차 방송작가인 권지현(41) 씨는 대구지역 방송사에서 TV와 라디오를 오가며 일하고 있지만, 작가들의 평균 임금도 노동시간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정량화할 수 없는 방송작가의 노동환경을 어떻게 표현할까 걱정했다.
지난달 24일, 전국에서 최초로 지역 방송작가노조가 대구에서 출범했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 대구, 안동, 포항을 포함한 영남권 지역 MBC, KBS, TBC, 교통방송 등 4개 방송사가 주축이다. 조합원은 50여 명이었지만, 출범식에는 100여 명이 참석했다. 아직 가입하지 않은 대구, 경북 지역 작가들, 전국언론노조 대경협의회 등에서 참석했다.
2000년대 초 대구, 마산 MBC 작가들이 주축으로 방송작가노조를 만들려다 모두 해고되면서 노조 결성이 무산된 적이 있다. 권지현 작가도 지난해, 서울에서 방송작가노조 출범 이야기가 들렸을 때도 반신반의했다.
“20년쯤 전에 대구, 마산 MBC에서 주축이 돼서 노조를 만들려고 했을 때 다 해고가 됐었데요. 2000년도 가을이었을 거에요. 동대구역 근처 어느 뷔페에서 만나서 간담회도 했었고, 지금 대구MBC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 작가들이 까만 조끼 입고 농성할 때 과자 사들고 찾아가고 그랬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랬는데 결국 다 흐지부지됐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될까?’ 생각했어요, 사실”
서울에서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가 2017년 11월 출범한 뒤, 권지현 작가도 노조에 가입했다. 알음알음 작가들에게 연락해 노조가 생겼다는 소식을 알렸다. 올해 1월, 서울에서 노조 간부가 대구로 내려와 첫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만 20여 명이 모였다. 대전, 세종 간담회 때도 10명이 채 안 모였다고 한다. 간담회가 끝나고 권지현 작가는 영남지회 부지회장이 됐다.
기획 단계는 ‘무임금’ 노동
올림픽 편성으로 월급 반토막
원고료는 15년째 제자리
방송 작가가 ‘투잡’하는 이유
권지현 작가는 처음 일을 시작했던 2001년보다 지금 받는 임금이 더 적다. 당시 일주일에 이틀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지금은 평일 매일 방영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임금은 30만 원가량 적다. 방송사마다 임금 책정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새 프로그램을 맡을 때 임금이 얼마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얼마를 주시나요’ 묻는 걸 암묵적으로 못 했어요. ‘여기서 일하는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이런 분위기가 있어 온 것 같아요. 이제는 20년 가까이 일하다 보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지금 누가 어디서 일하자고 하면 얼마 주냐고 물어야겠다 생각하죠”
방송 작가 임금은 맡은 프로그램에 따라 방송 시간 또는 원고지 매수로 책정된다. 한 달에 몇 회 방송되느냐에 따라 다음 달 임금이 정해진다.
프로그램을 맡아 피디와 함께 기획하고, 답사하고, 섭외하고, 원고 쓰고 심지어 화면 구성이나 상품 관리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특집 프로그램은 6개월 동안 기획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임금은 방송된 프로그램 기준의 원고료뿐이다.
방송작가지부가 지역 방송작가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대구경북 작가 49명 중 18명이 월 150~200만 원, 17명이 100~150만 원을 받고 있었다.
“6개월 치열하게 준비해서 1시간짜리 방송이 나가면 1시간 돈을 받아요. 그런데 정말 운이 안 좋아서 방송 편성이 안 되면 돈이 안 나와요. 한 회당 일에 상응하는 임금을 줘야 하는데 한 회 많아 봐야 3~40만 원?”
지난 2월에는 평창동계올림픽으로 3월 월급이 반토막이 됐다. 올림픽 프로그램 편성으로 기존 정규 프로그램 대부분이 결방됐다. 설상가상 설 연휴까지 겹쳤다.
방송사마다 등급별로 원고료가 책정돼 있지만, 어떤 기준으로 등급이 오르는지 알 수 없다. 등급에 매겨진 임금 역시 15년째 제자리다.
“내가 제일 높은 등급을 받아서 예를들어 올해 4천 원을 받았으면, 내년에는 1~200원이라도 올라야 하잖아요. 최저임금, 물가상승률, 경제 발전과 상관없이 계속 4천 원이에요. 그 임금이 안 오른지 15년이 넘은 거죠”
방영 프로그램을 기준으로 임금을 책정하다보니 방송작가 임금은 매달 달라진다. 달력을 보면서 이번 달엔 몇 회 방송이 나갈 수 있겠구나 예상하는 수밖에 없다. 갑자기 프로그램이 개편되거나 작가가 교체될 수도 있다.
방송사에 일하던 시절 권지현 작가는 책상 위에 개인용품을 두지 않았다. 당장 해고당해도 다음 날 짐을 찾으러 올 일을 없게 하기 위해서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으니 부당해고를 다투기도 어렵다.
“내가 언제까지 일하는지 모르는 거죠. 프로그램이 끝나면 대구는 고정적으로 제작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으니까 다음 프로에 넣어 주기도 하는데, 그래도 나가라면 나가야죠. 텔레비전 작가는 상근해야 해서 책상이 있거든요. 저는 가습기나 연필꽂이 이런 거 안 놔뒀어요. 해고당하고 짐 싸써 들고나오는 제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 서글프더라고요”
이번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구경북 작가 49명 중 43명이 투잡을 하고 있거나 한 경험이 있었다. 이중 ‘늘 하고 있다’고 답한 이가 10명, ‘대체로 하고 있다고 답한 이’가 18명이다.
“방송 하나만 해서는 못 벌어 먹고살아요. 제가 23살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돈 좀 적게 받아도 ‘메인 맡으면 오르겠지’ 희망이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지금 그때보다 적게 받아요. 견디면 해뜰 날 올거라고 했는데, 해 안 뜨는거 본 사람들이 지금 노동조합하겠다고 나선 거죠”
견뎌도 해가 안 뜨더라
직업인으로서 가치 인정받고 싶어
근로계약서, 4대보험 없는 사각지대
원고료 현실화 가장 시급
이번에도 노조 만들기가 흐지부지되지 않을까 했던 권 작가는 부지회장이 되고 나서도 확신이 없었다. 자리만 맡겨 놓고 다들 떠나는 게 아닌가 했다. 부지회장이 되고 주말을 단체 채팅방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자 누군가 빨리 출범식 장소를 구해야 한다고 했고, 장소 이야기가 활발히 오갔다. 모두 한 마음으로 노조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고의 두려움, 낙인의 두려움을 넘어선 것 같아요. 일한 만큼 버는 것, 돈으로 가치를 메기는 게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일한 만큼 인정받고 싶고, 직업인으로서 방송 작가의 자부심과 가치를 인정받고 싶고, 그렇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찾고 싶은 게 해고의 두려움을 넘어 선 것 같아요”
지금도 해고나 낙인의 두려움은 있다. 그 두려움보다 큰 것이 작가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시사프로그램 원고를 쓸 때면 사회에 소외된 이들을 소개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사회 곳곳에서 있었잖아요. 학습지 교사들, 택배 기사분들… 저희가 제일 늦었죠. 방송 작가들이 이런 분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들려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정작 우리는 우리 권리를 못 찾고 있었죠”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말,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마련했다. 문체부는 방송사 또는 제작사에 작가와 근로계약서를 쓰라고 권고했다. 근로계약서에는 ▲프로그램명 ▲방송 일시/시간/횟수 ▲제작 형식 ▲제작 길이/편수 ▲원고료(기획료, 구성료, 집필료, 자료비 등) 등을 명시하도록 했다.
방송작가노조는 앞으로 근로계약도 명확히 하고, 4대보험도 가입해 노동자로서 권리를 찾을 예정이다. 다행히 각 방송사에서 협의해 나가려는 손을 내밀었다. 권 작가는 원고료 현실화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방송 시간이 정해져 있어도 원고 쓰는 시간은 다르니까. 그것도 어느 날은 정말 쓸 게 없으면 4~5시간 넘어가요. 계속 찾고, 뒤지고, 고민하고. 일하는 시간도 천차만별이라 근로계약서를 쓴다고 해도 정량을 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우선 바닥 원고료부터 올리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앞으로 저희 활동을 긍정적으로 지켜봐 주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