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9) 청주 이감, “말씀 다 하셨습니까?”

15:40

1986년 봄, 화원교도소에 있던 우리는 각각 다른 곳으로 이감됐다. 선배는 춘천, 동기는 순천, 나는 청주였다. 교도소 버스를 타고 청주로 향했다. 큰 버스에는 달랑 나와 교도관 3명, 운전하는 사람 1명이 전부였다.

청주교도소에 도착해서 감방으로 향했다. 독방이지만 넓은 방이었고, 그곳은 미결수 사동이었다. 일반수들을 여러 명 수용하는 감방에 정치범 한 명을 수용했던 것이다. 아마도 박근혜의 경우 이런 방을 2~3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교도관들의 태도가 빡빡해 보였다. 이감을 오면 다시 징역을 풀기 위해 개척해야만 했다. 개척은 거창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라 게기기, 싸우기 같은 것들이다.

저녁이 됐다. 어디선가 송창식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래 실력이 꽤 빼어났다. 그리고 그가 학삐리라는 느낌이 팍 왔다. 복도와는 반대편으로 난 창으로 가서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거기 노래 부르는 사람”
“왜요?”
“학생이요?”
“그런데요”

그렇게 서로 인사했다. 그와 대화를 통해 1명이 그 사동에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서강대 학생회장 출신인 고○○이었고, 다른 1명은 성대 삼민투 위원장 출신인 ○○○이었다. 다음날 보기로 하고 통방을 마쳤다. 통방은 교도소 안에서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에서는 금지된 행위였다.

아침이 밝아왔다. 나는 그들을 만날 생각으로 교도관을 불렀다.

“담당”
“왜유?”
“문 좀 열어주소”
“왜유?”
“옆방에 친구들 좀 만나게요”
“안 되유”

대구에서는 없던 일이다. 대구는 문을 열어달라면 열어주었다. 물론 싸움을 통해 얻은 것들이었다. 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무거움이 조금 느껴졌다. 다시 교도관을 불렸다.

“문 좀 열어주소”
“안 되는데유”
“아니 물이 없네요. 물 떠와야 해요”
“그럼 물만 뜨고 빨리 들어가야 해유”
“알았어요”

문이 열리자 물통을 들고 나갔다. 나가는 길에 고○○ 방 앞에 서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도관이 어쩔 줄 몰라하며 빨리 물을 뜨러가라고 재촉했다. 세면장으로 가다가 사동에 달린 작은 운동장에 물통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운동장으로 나가서는 물도 뜨지 않고 방으로도 들어가지 않고 혼자 놀기 시작했다.

▲사진=pxhere.com, 저작권 없음

담당 교도관은 어쩔 줄 모르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금 있으니 관구부장과 함께 나타났다. 관구부장은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정웅인같이 이파리 3개의 계급을 가진 교도관이다. 일반적으로 각 사동 담당들은 이파리 2개가 맡는다. 그 위에 무궁화 2개인 관구주임이 있다. 당시 관구부장들은 교도소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불러 관구실로 데리고 갔다.

“류동인, 너 그렇게 수용생활하면 재미없어”

다짜고짜 반말부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일장 훈계를 늘어놨다. 그의 말이 끝났다. 그때까지 나는 고개숙이고 고분고분 듣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에 대한 나의 대응방침이 결정됐다.

“저 말씀 다 하셨습니까?”
“그래”

고분하게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 XX놈이 어디서 공갈을 치고 지랄이고, 야 이 XX놈아 니 맘대로 해봐라, 내는 앞으로 살날이 많아서 그래는 못살겠다.”

고분고분하다가 갑자기 돌변한 나의 행동에 관구부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담당 교도관은 옆에서 멱살 잡은 손을 당기며 말리기 급급했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그러는 것은 요즘 같으면 패륜이니 어쩌니 할 만한 사안이었지만, 당시로는 서로가 그런 체면을 따질 수 없었다. 단순하고 아주 단순명쾌했다.

달리 ‘단과반’이었겠는가? 그는 ‘파쇼의 주구’, 나는 ‘민주주의의 투사’, 관구부장이 사라지고서 잠시 후 교도관들이 몰려왔다. 나를 붙들어서 방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날은 그렇게 1차 투쟁을 마무리했다. 어차피 교도소 안 싸움은 지속될 것이었다.

다음 날이었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감방 철문을 발로 찼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방 끝에서 도움닫기를 해서 이단 옆차기로 날아가서 찬다. 그렇게 수십 번을 차대자 철문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결국, 문을 잠근 빗장이 빠져버렸다.

나는 복도로 나갔고, 밖에서 대기하던 교도관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마 자신들도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운동장으로 나가서 한참을 놀다 오자 다른 문으로 깔끔하게 교체돼 있었다. 그 뒤로 교도소 측에서는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다른 사동 방으로 전방을 시켰다. 그 방은 오히려 좀 더 넓고 환경도 좋았다. 당연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있는 방 바로 2층에는 서울대 깃발사건으로 온 민○○ 형이 있었다.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몸이 엉망이었다. 하루는 나에게 지압과 관련된 책을 주었다. 공부해서 지압해달라고 했다.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어설픈 지압을 해주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