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1) 나의 최종점은 긍지

16:31

[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연대기적인 시간을 따라가며 시의 변화를 따지는 것은 분명 과한 태도이지만, 김수영에게는 그러한 접근이 이해의 통로를 넓혀준다. 그에게 벌어진 사건을 토대로 시의 변화를 추적해보는 것은 얼마간 유효하단 뜻이다. 1954년까지의 그의 시는 ‘설움’과 ‘오욕’에 시달이고 있었지만 1955년에 들어서면서 그런 수동적 정서는 서서히 그 자취가 엷어진다. 김수영의 ‘오욕’과 ‘설움’은 당연히 생활과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달나라의 장난」)의 간극에서 발생하며, 그 간극을 지워나가려는 정신의 고투는 “피로”를 가져온다. 「구슬픈 육체」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앞서가게 하면 “잊어버린 생활”이 “불을 끄고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잊어버린 생활”은 “귀중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이다. 아직 김수영에게 생활은 현실의 등을 켜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다만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며 그것만을 힘삼고 있”지만 그 “불굴의 의지” 사이사이로 “귀중한 생활들”은 곧잘 빠져나간다. “땅과 몸이 일체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은 “땅과 몸이” 괴리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땅과 몸”의 괴리에 대해 1955년 2월에 쓴 「긍지의 날」에서는 이렇게 쓴다.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괴로워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다. “땅과 몸”의 일치는 마치 “순환의 원리”처럼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결의와 행동은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니어서 괴롭고 “영원히 피로”를 안길 것이다. 이 악무한을 뚫고 나가는 일이 곧 “고독한 정신”이며 동시에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는 일(「나비의 무덤」)이 현재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고투는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긍지를 느끼게 한다. 비록 현실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여기서 “하여”는 ‘쳐도’라고 바꿔야 읽어야 뜻이 명료해진다. “하여”는, 요동이 있어야 소리가 없어진다는 역설paradox을 드러내는 조사이다.) 아무리 생활의 세속이 “비처럼 퍼부어”도 나의 정신은 이제 그 비에 “젖지 않는”다.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이제 김수영은 “피로”와 “긍지”와 “설움”의 변증법을 알았다. “긍지”는 분명 “나의 최종점”이지만, 그 “최종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자신이 생활 속에서 구현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순간 그는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에 따라 “피로”와 “긍지”는 만들어진다. 아니 “피로” 자체가 “긍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순간은 “한치를 더 자라는” 순간이며, “모든 설움이 합쳐지”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인 순간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다시 “모든 설움이 설움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즉 김수영이 느끼는 “긍지”는 “설움”을 초탈하지 않으며 도리어 “설움”이라는 정서를 유발시키는 현실에 뿌리내릴 줄 아는 힘을 가지게 될 때 “긍지”가 따라온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문제는 ‘어떻게’로 전환되는데, ‘어떻게’에 따라 “피로”는 수고 다음에 오는 ‘건강’이 될 수 있다. 이 건강의 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 그 순간이 바로 “긍지의 날”이다.

그런데 이 갑작스러운(?) 돈오(頓悟)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일단 김수영의 시적 여정에서 갑작스러운 것은 애당초 없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김수영에게는 미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이 잠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잠재적 역량은 결단과 행동에 의해 변화·증강된다.) 김수영의 위대함은, “자신을 고쳐야 할 운명과 사명”을 심리적인 결의로서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중요한 것은 “운명과 사명”이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주의적인 결의의 인식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에 자신을 던져 넣어 “자신을 고쳐”가는 행동에 있다. 물론 “긍지의 날”을 느끼게 된 데는 그에게 찾아온 생활의 변화가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김현경과의 재회와 서강으로의 이전은 그의 심리를 안정시켰던 것 같다.

「긍지의 날」에서 보여줬던 긍정적 정서는 「영사판」에서도 되풀이된다. 먼저 자신에게 “어룽대며 변하여 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 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되는가”라고 자문하는 것은, 이제 표면적인 현실을 움직이게 하는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직 그 “어둠”의 원리나 법칙에 대해 자신할 수 없어 “두 어깨는 꺼부러지고” 있지만 “영사판 위에 비치는 길 잃은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통해 “나의 온 정신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화룡점정”은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느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김수영이 1955년 초반 즈음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예감에 전율했다는 점이다. 사실 시적 순간은 바로 이런 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김수영의 지성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예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탐구해 들어가는 산문적 정신으로 훗날 치환된다. 현재의 예감을 산문적 정신을 통해 구체적으로 조탁하지 않으면 미래의 예감은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도리어 그 예감의 전율에 만족해 산문적 정신의 등을 꺼버리면 그 순간 나태와 허위는 밀물처럼 시인의 영혼을 덮치기 마련이다.

「서책」에서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은 것”이고, “신밖에는 아무도 손은 대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느낀 예감의 정체를 아직은 몸으로 체득하지 못했다는 고백이며, 전율 다음에 오는 피로를 잠깐 내려놓으려는 휴식의 징후이다. 그리고 그 뒤에 써진 「휴식」은 그것에 대한 고백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나를 속이고 역사까지 속이고/ 구태여 낯익은 하늘을 보지 않고/ 구렁이 같이 태연하게 앉아서/ 마음을 쉬다”는, 건강을 얻은 자의 도약을 위한 휴식이지 퇴행을 준비하는 회피가 아니다. 「서책」에서 “신이여/ 당신의 책을 당신이 여시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신”에게 이 세계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만으로 “서책”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진실을 밝힐 단계는 아니라는 겸양의 고백이며, 이후 도래할 세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독단을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에는 ‘산 속’에 있던 짜라투스트라가 저잣거리로 내려와 위버멘쉬에 대해 설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처음에는 성자를 만난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헛고생하지 말고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라는 성자에게 짜라투스트라는 헤어지며 중얼거린다,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성자의 충고대로 “숲 가장자리에 있는 첫 도시”의 “많은 군중”은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줄타는 광대에 관해서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다”고 일축한다. 그러자 짜라투스트라는 조금 더 자세히 위버멘쉬에 대해서 말하다가 군중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이 있”음을 간파한다. 이어서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최후의 인간이 가장 오래 산다.”

“최후의 인간”에게는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을 품는 것이 그들에게는 죄스러운 것이” 되며, 그래서 “아주 조심조심 걷는다.” “때때로” “단 꿈”이라는 “얼마간의 독”을 마시다가 끝내 “편안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으며 부유해지지도 않는다. 이런 것은 너무도 귀찮은 일이다.” “그들의 조소에는 끝이 없다. 그들도 다투기는 하지만 이내 화해한다.” “사람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한 쾌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하면서 “눈을 깜박인다.” 군중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최후의 인간을 달라. 우리들로 하여금 그 최후의 인간이 되도록 하라!”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은 파도처럼 닥쳐오는 삶을 살 역량이 없는 자이며 “병에 걸리는 것(아픈 것-인용자)”과 “의심을 품는 것”을 꺼리는 존재이다. 그러면서 “행복을 찾았다”고 “눈을 깜박인다.” 이런 인간 유형이 결과적으로 가장 오래까지 산다고 니체는 말한다. ‘휴식’은 “최후의 인간”이 선호하는 상태다. ‘휴식’은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또 “돌에 걸리거나 사람에 부딪혀 비틀거리는” 일이 없도록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그저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최후의 인간”의 ‘휴식’은 고작 “편안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든 건강’이지만, 자기를 넘어서려는 자의 ‘휴식’은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과정 중에 존재하는 “하나의 교량” 즉, ‘건강한 병’이다. “한 방울의 정신조차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의 덕의 정신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말이다.

우리는 김수영의 「휴식」에서 제목과는 다르게 어떠한 나른함이나 도피 같은 수동적 정서를 느끼지 못한다. 도리어 발랄하고 능동적인 정서를 가득 내뿜고 있다. 시의 화자는 휴식이 갖는 부정적 의미를 알지만 이제 그것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잣나무 전나무 집뽕나무 상나무/ 연못 흰 바위/ 이러한 것들이 나를 속이는가/ 어두운 그늘 밑에 드나드는 쥐새끼들”마저? 남의 집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安穩)”하지만 이제 “나 역시 이 마당”에 어떤 “원한”도 없다. 이 ‘원한 없음’의 단계 이후에 김수영의 시가 한동안 흔쾌하게 전진하는 것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그전에 이 단계에 도달하게 된 구체적 계기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점을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작품이 「헬리콥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