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뉴스민은 아멜리 씨가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하는 ‘일상의 힘’ 가운데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을 필자 동의를 얻어 동시게재합니다.]
아이는 이제 막 생일이 지나 37개월에 접어들었다. 어른들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 아이의 말과 행동에는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뒤섞여 있기에 콩밭에서 잡초를 솎아내듯 걸러서 이해하고 반응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5개월 전, 지금보다 아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이미 비행시간이 열 시간이 넘고 환승까지 해야 하는 호주 여행을 해봤기에 이번 캐나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다만 캐나다 알버타 주에 있는 밴프를 둘러보기 위해 신청한 3박 4일의 그룹 투어가 조금 걱정되었다.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수시로 버스를 타고 내려야 하는 투어는 아직까지 경험이 없었던 탓에 잘 할 수 있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는 영화도 보고 화장실도 불편 없이 갈 수 있지만, 버스는 교통 상황을 가늠할 수 없고, 아이가 스스로 배뇨까지 컨트롤하기란 어렵기 때문이었다.
온갖 소소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2200킬로가 넘는 버스 여행에 잘 적응했다!
창밖에 보이는 나무와 산과 호수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하고, 휴게소에 들르는 시간 간격에 맞춰 화장실도 곧잘 다녀왔다. 차멀미를 하는 일도 없었고, 잘 놀고 나면 낮잠도 잘 잤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아이’포비아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룹 투어의 분위기 파악에 소홀한 내 책임이었을까? 버스에 오른 지 30분 후 잠깐 버스가 추가 손님을 태우기 위해 정차한 곳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같은 투어 멤버인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저기요, 아이가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잘 못 자겠거든요. 좀 조용히 시켜주세요.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씻던 손을 계속 씻고 돌아서 나오는데 불쾌하진 않았지만 느낌은 좋지 않았고, 세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1번. 아이가 울거나 떼를 쓴 것도 아니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포인트에서 시끄럽다는 생각을 했을까?
2번. 아침 9시에 투어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을 방해한다고 항의를 한다면 투어 버스를 수면 버스로 이해해야 하는가?
3번.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투어 버스에서 유발 가능한 소음은 어느 정도인가? 여기가 도서관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잠을 못 잘 정도로 시끄러웠다는 30분 동안 아이는 좀처럼 조절되지 않는 데시벨로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주로 방구와 똥이 주제였다.) 나는 추임새를 넣으며 아이에게 반응해주었고, 이 정도의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소음으로 전달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어쩌면 이게 맘충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글을 쓰는 지금 든다.) 우선은 누군가에게 방해가 된다고 하니 아이의 데시벨 조절에 적극 참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길고 긴 버스 여행길에 올랐다.
둘째 날이 되었다. 캐나다 밴프는 상상 이상으로 멋졌다. 창밖에 흘러가는 풍경도, 빙하가 녹아 고여 있다는 호수의 물빛도, 빙하가 쌓여있는 산도 모두 대자연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초록색의 침엽수림에 대해서, 줄기가 새하얀 자작나무에 대해서, 날아가는 새에 대해서, 흘러가는 구름에 대해서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 중간에 아이는 심심함을 달래려 노래도 부르고, 손장난을 치고 까르르 웃기도 했고, 놀다가 지치면 잠들기도 했다. 그 사이사이에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30대 후반 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혼자 여행 왔다.)이 내뱉는 말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들으라고 대놓고 뱉은 말이었기에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이씨, 시끄러. 짜증나. 휴.(세상이 모두 꺼질듯한 한숨)
그랬다. 아이의 즐거운 말소리, 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아이의 노래소리는 모두 ‘소음’ 덩어리였다. 그 소리들은 나에게만 아이의 재잘거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공사장 인근에서 들리는 땅을 깨부수는 소리, 시위 현장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과 구호, 머리 위를 아주 낮게 지나가는 비행기 엔진 소리에 버금가는 ‘소음’ 그 자체였다.
울지도, 떼쓰지도 않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놀고 있는 아이가 내는 소리들 조차 누군가에게 소음이 되는 상황이 이틀 연달아 계속되었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아이’포비아들과 같이 여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와 동물 출입은 금지한다는 카페와 식당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아이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이런 내용은 주로 뉴스 기사로만 접했다), 그 현실을 직접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아이와 일상생활을 영위한 곳은 대부분 아이를 위한 곳이었다. 아이가 멋대로 뛰어놀고 넘어질 수 있는 들판과 공원, 아이들이 왕 대접을 받는 키즈 카페, 아이의 천국 놀이터가 주된 방문지였다. 이곳에서 아이의 목소리와 활동은 ‘위험’ 유무로 판단하는 것이 전부였다. 위험하지 않고, 다른 친구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종류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래, 여긴 아이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고, 어른들의 공간이었다. 아이는 그저 그 공간을 침범한 에어리언 같은 존재였다.
그때부터 버스라는 갇힌 공간과 아이를 문제아처럼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차창에 흘러가는 그 멋진 풍광이 모두 부질없어 보였고 어서 빨리 숙소에 도착해 아이를 이 공간에서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동물이 아니다. 아이는 잘 훈련된 동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스스로 보고 느끼고 표현하기를 원한다. 어른이 정해놓은 규율이 너무 엄격해 불편 부당하다고 느낄 경우 아우성을 치기도 한다. (주로 이럴 때 울고 떼를 쓴다.) 규율과 규칙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행동에 옮기는 시간이 어른보다 더 긴 아이에게 어느 정도는 스스로 인지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한두 번의 설명으로 아이에게 주요 정보를 모두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끈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안내하고 또 안내해야 한다. 특히나 새로운 곳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규칙들을 인지시키는 것은 참으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아이에게 규칙을 알려주었다.
1번. 귓속말하듯 소곤소곤 말하자.
2번. 버스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치니 앉아서 놀자.
1번과 2번을 주요 멘트로 녹음해 입에 달아놓고 아이의 귓속에 욱여넣었다. 아이의 컨디션을고려하면서 버스 투어의 규칙을 인지시키려니 나만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셋째 날이 왔다. 내 입은 녹음기 역할을 충실히 했다. 아이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웃고 떠들기도 했지만, 규칙에 따라주기도 했다. 아이의 기분은 늘 좋았고, 여행이 즐겁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통로를 두고 나란히 앉아있던 20대 초반의 여성으로부터 왕펀치를 맞았다.
저기요, 아이 관리 좀 하세요.
이 한마디를 듣고 미안하다고 말을 했는지, 그냥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 여성을 바라봤는지(혹은 째려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3일 동안 난 이들에게 ‘맘충’이었겠구나. 아이의 데시벨 조절에 실패하고, 아이를 컨트롤 하지 않고, 아이의 망나니 행동을 방관한 ‘맘충’. 셋째날도 벤프의 풍경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황홀했다.
아이는 이 세상에 어떤 존재일까.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프로그램에 편집되어 비치는 아이의 모습이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프로그램 속 아이들은 엉뚱하고, 코믹하면서 예의 바르다. 규칙도 잘 이해하고, 잘 따르기도 한다. 그 뒤에서 규칙을 인지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부모의 모습도, 그 규칙을 거부하느라 울음으로 대처하는 아이의 모습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결과만 보여주기에 늘 아름답고 깔끔하다.
아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표현하고,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물론 그 방법은 어른과 다르고, 참을성도 부족하다. 어른이 먼저 참을성을 가지고 아이를 기다려주기도 해야 하고, 어른이 가져야 하는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야 할 때도 있다. 아이는 트레이닝 센터에서 훈련받은 개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부모, 어른들과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 부모만 아이를 키우는 건 아니다. 온 세상이, 온 지구의 에너지가 한 아이를 인간답게 키워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야 하는 아이, 장애인, 노인에 대한 배려에 인색하다. 사지가 멀쩡해서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과 버스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보행의 권리와 이동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임산부를 위한 핑크석에 대한 배려도 배가 불룩한 임산부가 뒤뚱거리며 걸어와 앞에 서 있지 않은 한 비워둘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비워두면 자원 낭비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여행 마지막 날,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 한 분이 한마디 건네주셨다.
애들이 힘들고 지루했을 텐데 짜증 한 번 안내고 여행을 완주했네요. 참 기특해요.
이 말 한마디에 봄볕을 만나 녹아내리는 눈마냥 굳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세상 모두가 나와 아이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봐주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는 ‘맘충’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세상이 함께 키우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대해주면 좋겠다. 아이는 꼬리 살살 흔드는 애완견이 아니다.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