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에서 여길 와야 합니다. 식순지를 보니까 합천군 주최로 되어 있던데, 정말 대한민국이 나와야 합니다. 한국에서 너무들 모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일본은 학생들 수학여행으로 히로시마 원폭자료관(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많이들 찾습니다. 교육의 일환입니다. 정부가 관심을 보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1948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김수광(69) 씨는 국가 차원에서 원폭 피해자를 돌보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한국 상황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김 씨는 지난 2010년부터 매년 두 차례 합천원폭피해자복지관을 찾아 아코디언 연주를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40년 넘게 아코디언 연주를 했고, 아코디언 연주를 통한 음악치료 일을 하고 있다.
김 씨의 아버지는 1945년 8월 6일 당시에 히로시마에 있었다. 김 씨 역시 원폭 2세대인 셈이다. 김 씨는 아버지가 당시 병원에서 일하다가 건물이 무너지면서 복부에 큰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아버지는 자기는 죽는 줄 알았다고 해요. 배가 터져서 장기 흐를 정도였다고. 조선인 치료는 아무래도 뒷전이니까, 죽을 줄 알았대요”라고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길 전했다.
김 씨는 2009년 우연히 합천복지관 직원들이 히로시마로 연수를 왔다는 뉴스를 보고 무작정 그들이 묵는 숙소를 찾아갔다. 복지관에서도 아코디언 연주를 하고 싶어서였다. 김 씨는 히로시마에서 주로 원폭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치료 일을 하고 있었고, 한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자신의 음악을 전하고 싶었다. 복지관 직원에게 뜻을 전하고 동의를 얻었다. 이듬해부터 사비를 들여 합천을 찾기 시작했다.
올 5월에는 7년 동안 합천을 오간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이 일본음악요법학회를 통과해 직접 발표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 원폭 피폭자에 대한 음악 요법’이라는 제목의 발표는 일본에서도 흥미를 끌어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김 씨는 “위안부 문제라든지 여러 문제가 있으니까 통과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통과가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 씨는 매년 봄, 가을에 합천을 찾았지만, 올해는 봄 그리고 여름인 8월에 합천을 찾았다. 지난 봄에 찾아왔을 때 한창 공사가 마무리 중인 원폭 자료관을 봤기 때문이다. 김 씨는 “한국에서 자료관 개관이 역사적인 날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나라에 고위급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아쉬웠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는 6일 열린 원폭 자료관 개관식에 앞서 ‘원폭 희생자 위령가’를 연주했다. 원폭 희생자 위령가는 매년 이맘때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제에서 불리는 노래다. 연주를 마친 김 씨는 소감을 묻자 목이 멘 채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드네요”라고 말을 아꼈다.
올해로 8년째 합천복지관에서 아코디언 연주를 하는 김 씨는 여력이 닿는 한 계속 합천을 찾아올 계획이다. 그는 “제가 연주하는 걸 보고 어르신들이 웃는 걸 보면 기뻐요. 그걸 보면 저도 정말 많은 걸 얻어가는 기분이에요”라면서 “이번엔 돌아가면 영사관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아요. 히로시마 피해자 대표자들이 여길 찾아와야 해요. 일본에 돌아가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라고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관련기사=[국내 첫 원폭자료관 개관①] 자료관 개관이 남긴 숙제···‘만든 거로 끝 아니다’(‘17.8.6), [국내 첫 원폭자료관 개관③]“일본 패배 원폭 때문 아냐···‘원폭 신화’에서 해방되어야”(‘1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