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주지하다시피 ‘푼크툼(punctum)’이란,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내세운 이 개념은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바르트는 푼크툼과 함께 ‘스투디움(studium)’의 개념도 정의했는데, 스투디움이란 사진을 볼 때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통된 느낌을 갖는 것,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는 것을 뜻한다.
생각기로, ‘푼크툼/스투디움’의 개념은 작가 특유의 내적 체험이 독자들의 보편적인 정서 혹은 개별적인 정서와 연계됨으로써 공감과 공유를 이끌어내는 예술경험 전반의 특징을 사진에 국한해서 적용한 데 불과하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나는 성기완의 작품 「푸른 큰 쓰레기통의 뜻을 지나며 묻는 새벽」을 읽으며 ‘시에서의 푼크툼’이라할 만한 경험을 했다. 새천년에 해당할 “새벽”, 그 새벽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이면을 “푸른 큰 쓰레기통”이 놓인 배경에 빗대어놓았음이 분명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형광 조끼 입은 아저씨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시의 ‘언어’가 나를 찌르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경험이 얼마나 짜릿했던지, 내가 미화원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유쾌했다.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아직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말하겠어 대신 나는 푸른 큰 쓰레기통을 지나며 내음을 맡지 그것들이 퍼르스름한 대기 속을 엎드려 있어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라 일컬어지는 형광 조끼 입은 아저씨들이 큰 젓가락으로 그 시체를 후비고 있어 심호흡을 할까 나는 세기말의 부랑자 걷고 또 걸어도 대답 없는 저 푸른 큰 쓰레기통 왜 도대체 왜?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좇도 아니라고 말하겠어 그냥 큰 푸른 쓰레기통을 지나치는 시간이라 말하겠어 ? ?―성기완, 「푸른 큰 쓰레기통의 뜻을 지나며 묻는 새벽」 전문
15.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은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죄를 자녀들한테 자주 사과한다고 한다. “너무 어두운 세계관이 아닐까요?”라고 그에게 반문했지만, 내심 나도 자식들을 대할 때 죄의식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 죄의식에는 점점 심해지는 빈부격차, 거덜나고 오염된 지구를 물려준다는 ‘거창한’ 의식도 들어있다.
작가로서의 내가 언격(言格)이 곧 인격(人格)이라며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예민하게 반응하듯, 미화원인 내 눈엔 오나가나 쓰레기고, 그 넘쳐나는 쓰레기가 거슬린다. 억 단위의 보증금을 내고 들어와 백화점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업체로서야 거기서도 ‘돈’이 보이겠지만 말이다.
정작 환경오염의 실태를 모르고 하는 순진한 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내 보기에 백화점만큼이나 유해물질이 많이 배출되고 분리수거가 심각한 곳도 없다. 일단 청소부인 내 손을 거쳐서 버려지는 것들만 살펴보자. 테이크아웃컵은 그 자체로도 공해지만, 남은 음료수가 쏟아져 있어서 성인 허리 높이 정도 크기의 비닐봉지가 재활용되지 못한 채 곧장 버려진다. 층마다 비치해둔 대형휴지통이 대여섯 개가 넘고, 주간과 야간이 각각 한 번씩만 비운다고 쳐도 그 수가 적지 않다. 정수기와 자동인출기에 딸린 휴지통의 비닐봉지는 어떤 땐 종이컵 하나, 찢어진 영수증 한 장 들어있는 게 다인데도 버려진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음료수가 쏟아져 있기는 다반사고, 씹다 버린 껌이나 뱉어놓은 사탕 등이 있어서다. 껌이나 사탕의 냄새를 어쩌지 못하니 봉지가 아까운 건 문제가 아니다. 사무실에서는 사용한 A4용지나 모아둔 일간지를 한꺼번에 내놓곤 하는데, 그것들도 무신경한 직원들에 의해 ‘거의 항상’ 뭔가로 더럽혀져 있다. 결국, 내 안의 ‘소심하고 도덕적인 주부’가 분리수거를 따지며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폐지를 일반 쓰레기와 함께 대형 비닐에 담아 슈터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게 된다. 여기까지는 약과다. ‘문화센터’에서 쏟아지는 쓰레기의 양은 진부하나마 ‘산더미 같다’는 표현이 마침맞다. 이런 형편이니, 매일같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생각하는 자체가 내겐 현기증 나는 일이다.
사무실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직원들 발치마다 놓인 서른 개 가까운 휴지통을 비우는 일도 내 몫이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들어서면, 어찌 된 노릇인지 그때까지도 에어컨이 켜져 있다. 텅 빈 사무실에 에어컨이 저 혼자 빵빵하게 돌아가는 광경을 보노라면, 각종 전열기구가 뿜어대는 열기로 말미암아 찜통 같은 공간에서 땀에 흠뻑 절어 일하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비참하게 느껴진다. 한때 백화점 측에서는 영업시간 이후, 전력절감을 핑계로 정수기의 전원마저 내려버린 적이 있다. 냉수가 아닌, 그저 마실 물을 찾아서 우리가 이 층에서 저 층으로 찾아 헤맨 게 불과 얼마 전인 것이다. 에어컨바람을 쐬는 뜻하지 않은 호사를 누리면서도 내 마음에 날이 서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여유로운 누군가는 함부로 쓰고 버리고, 힘겨운 누군가는 그들이 버린 걸 줍고 치우며 연명한다. 어느 조직에는 남아돌아가는 전기가, 어느 조직에는 언감생심 사치다. 물론 이 같은 구분은 화이트칼라/블루칼라처럼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면이 있고, 나 자신 미시적 일상현실이 거대한 구도의 재현이거나 증명임을 완전히 확신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기분이 언짢은 건 어쩔 수 없다. 이게 상대적 박탈감인지, 아니면 그저 만만한 “대리표적”(지그문트 바우만)에 분노를 투사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던 김수영의 시가 자꾸 생각나는 날이다.
16.
저 등대를 세운 사람의 등대는 누가 세웠을까.
물의 사람들은 다 배화교의 신자들.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생의 노를 저어
부서진 배를 바닷가에 댄다.
등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배를 비끄러매고,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으로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른 길을 걷는다.
내 생의 등대가 저 깜빡이는 불빛 아니던가.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
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들.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이고 등불을 끈다.
―김선굉, 「등대」 전문
퇴근 전, 방에 돌아온 H 언니의 티셔츠는 땀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한 탓에 소금이 허옇게 떨어진다. 무릎 관절이 모두 망가진 H 언니는 앉아서 엉덩이로 바닥을 미는 자세로 어기적거리며 바지를 갈아입는다. 늘 밝고 씩씩하던 언니가 웬일로 “사는 게 고단해 못살겠다. 한 달만 죽었다가 깨어났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투덜거린다. “죽고 사는 게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그리고 어디 맘 편히 죽을 수나 있겠어, 손자들이 눈에 밟혀서.” 비슷한 연배의 B 언니가 실실 쪼개듯 눈을 흘긴다. 두 사람은 늘, 자식들이 효도하러 집에 찾아오는 것도 귀찮을 만큼 피곤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다가도 손자들 얘기만 나오면 입이 금방 벙그러진다. 저 죽일 놈의 핏줄!
17.
“설마? 농담하지 말아요.”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는 인사에, 백화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고 대답하면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반응 중 하나다. 우회하거나 침묵하는 지혜가 부족해서, 나는 노출증환자처럼 나를 난폭하고 과장되게 드러내고야 만다. 어쨌든 결코 거짓말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면 사람들은 당황하며 한동안 말을 멈춘다. 더러는 ‘위장취업’을 한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불사한다. 그런 그들에게서는 저 7, 80년대의 노동사적 아우라(Aura)에 대한 기대마저도 엿보인다. 내게 ‘환경미화원’이란 직업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통용되는 매우 보편적인 이해관계, 결합수단 및 의사소통의 수단을 제공해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현저한 인격의 보존, 개체성 및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게오르그 짐멜)는 돈, 그 ‘돈’을 벌게 만드는 수단일 뿐인데 이걸 지인들한테 납득시키기가 이다지도 어렵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단지 클리셰(cli·ch?)에 불과하더라는 경험의 토로가 아니다. 대학교의 비정규직 시간강사, 나아가 문학평론가라는 타이틀과 ‘환경미화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모를 만큼 꽉 막혔거나, 세상의 진부한 관념에 맞서 에너지를 투자하는 이상주의적 삶과 나는 거리가 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적당히 상식적이거나 이중적’이고, 때문에 속물이라면 속물일 그저 평범한 인간일 따름이다.
그런 내가 환경미화원이 된 데는 매문위활(賣文爲活)을 할 정도로 청탁이 줄을 이은 것도 아니고, 문화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를 활용할 주변머리가 없었던 탓이 크다. 물론 진을 빼가며 원고를 써도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 문학 환경에 화가 나기는 했었다. 거기다가 자기고집대로 하는 바람에 기어코 가계를 위태롭게 만든 남편한테 자학적으로 화를 내려는 치졸함, 형편에 맞춰서 사는 본을 자식들한테 보여줘야 한다는 맹모(孟母)적이고도 강박적인 심리가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렇더라도 굳이 백화점의 야간 환경미화원이 된 이유란, 한 주에 이틀 있는 강의시간을 피해갈 수 있고 ‘주오일 근무제’여서 쉬는 날 원고를 쓸 수 있다는 나름의 계산이 서서였다. 무엇보다 일을 시작할 때는 몇 년을 지지부진하던 논문 주제가 통과되어 비로소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점이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하다가 형편이 나아지는 즉시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므로 수기나 르포르타주에 못 미치는, 일기도 독서일기도 아닌 이 어정쩡한 글쓰기는, 순전히 ‘가난의 맨얼굴’을 대면한 놀라움에서 시작되었다. 그 얼굴은 낯설고 기괴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놀라웠다.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이나 도처에 가난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