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경 칼럼] 스톤월 항쟁의 교훈, ‘빼앗긴 권리’ 앞에 기다림은 미학이 아니다

"너무 오래 지체된 정의는 정의에 대해 거부하는 것과 같다"

16:35

미국에서 6월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LGBTQ Pride Month)이다. 성소수자들이 차별에 맞서 싸워온 역사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와 행진이 미 전역에서 벌어진다. 48년 전 일어난 스톤월 항쟁으로 시작된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은 이제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해마다 열리는 성소수자들의 투쟁과 축제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스톤월 항쟁이 일어난 장소를 기리는 이들. [사진=flcikr.com @corellianjedi2]

스톤월 항쟁은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작은 게이바인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 1969년 6월 28일, 토요일 이른 새벽 경찰 급습으로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주류면허 없이 불법으로 술을 팔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당시 주기적으로 행해지던 경찰의 게이바 단속이었다. 이날 새벽 급습도 처음에는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경찰은 바에 있던 사람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다 검사하고, 체포할 사람을 추려내 호송차에 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이 상황을 계속 지켜봤다. 그러다 갑자기 군중 속에서 경찰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여든 사람들이 동조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경찰의 폭력은 오랜 시간 참아왔던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당시 스톤월 항쟁에 앞장선 사람들은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거리를 떠돌던 유색인종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드랙퀸이었다. 오늘날 뉴욕의 부촌이 된 그리니치 빌리지의 성공한 전문직 성소수자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던 사람들,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조롱당하고 멸시당하던 사람들이 더이상 참지 않고 일어선 것이 스톤월 항쟁이다. 스톤월은 이후 성소수자 운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분수령이 됐고, 급진적인 성소수자 운동단체인 ‘동성애자해방전선(Gay Liberation Front)’을 탄생시켰다.

스톤월 항쟁 이후 전투적인 성소수자 운동은 계속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80년대 에이즈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에 맞서 감염인의 치료권과 인권옹호를 위해 시작된 액트업(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과 결혼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까지 성소수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싸워왔다.

투쟁은 결국 성소수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1996년 갤럽 조사에서 처음으로 동성혼에 대한 찬반을 물었는데, 68%가 동성혼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단지 27%만이 동성혼을 지지했다. 동성혼 찬성 여론은 매사추세츠 주가 미국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직후인 2004년 42%로 증가했고, 2011년에는 50%를 기록했다. 대법원이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내리기 불과 1년 전인 2014년 초 <워싱턴 포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미국인 중 절반이 넘는 59%가 동성결혼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특히, 젊은 층에서 동성혼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18세에서 29세 사이 사람 중 동성혼에 찬성한다고 답한 이들은 1996년의 41%에서 2014년에는 거의 두 배인 78%로 증가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스톤월 항쟁 이후 46년이 지난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국의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린다. 찬성 5표, 반대 4표의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하지 않은 주법이 연방 수정헌법 14조를 위반한다고 선포했다.

미국의 대법원은 진보의 가치를 대변하기보다는 주로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판결을 하는 보수적인 사법기관이다. 하지만 때때로 대법원은 진보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판결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수적인 대법관들의 마음을 바꾸게 한 걸까? 그건 미국의 다른 인권운동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소수임에도 굴하지 않고 싸워 온 사람들, 계속되는 투쟁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대중의 동의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그 사회적 분위기가 반전되었음을 판결로 확인해 준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리버럴 정치인들이 항상 소수자들 편에 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민주당 유력 정치인들이 항상 성소수자 편에 서지는 않았다. 성소수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당선된 빌 클린턴은 당선 후 군대 내에서 성적 지향을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소위 Don’t Ask, Don’t Tell 정책을 펴면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군인을 강제로 전역시켰다.

동성애자의 군 복무를 실질적으로 금지한 이 정책은 2011년에야 폐지된다. 또한 1996년에 결혼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것으로 규정한 결혼방어법(Defense of Marriage Act)에 서명함으로써 연방정부 차원에서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이자 정치적 파트너인 빌 클린턴의 이런 정책을 오랫동안 지지해 왔고, 오바마 대통령도 2012년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동성혼을 지지하지 않았다.

▲2009년 워싱턴 DC에서 벌어진 평등을 위한 전국행진. [사진=flick.com @Kyle Rush]

미국의 동성혼 합법화 투쟁에서 2009년 가을 워싱턴 DC에서 열린 ‘평등을 위한 전국행진(National Equality March)’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행진은 동성혼을 금지하는 캘리포니아의 주민발의안 8호에 대한 반대로 시작됐다. 하지만 주민발의안 8호 반대뿐 아니라, 오바마가 대선 공약으로 폐지를 약속했지만 정작 취임 후에 그대로 두고 있던 Don’t Ask Don’t Tell 정책과 결혼방어법에 대한 반대 그리고 취업이나 주택 등 다른 기회에서 성소수자 차별 반대 등 광범위한 요구를 내걸었다.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성소수자들뿐 아니라 이성애자들이 같이 연대한 것은 물론이다.

이 행진은 역사상 최초로 흑인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조직됐다. 오바마 정부에 대한 기대로 어떤 좌파적 비판도 새 정권에 대한 흠집내기로 여겨지던 상황이었다. 한 예로 부시 하에서 엄청난 대중을 동원하며 성장하던 미국의 반전운동은 오바마에 대한 기대로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하지만 성소수자 운동은 오바마 정부에 대한 환상으로 수동적으로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요구사항을 내걸고 나섰다. 결과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여러 법적, 제도적 평등권 쟁취로 열매를 맺었다.

노예제 폐지, 여성참정권, 흑인의 동등한 시민권적 권리쟁취 운동 등에서 보아 왔듯이, 거리에서 항의하는 대중의 힘이 커질 때에야 법원과 정치인들은 입장을 바꾸고 변신해 그 운동의 지도자 행세를 하려고 든다. 우리는 한국의 촛불시위와 탄핵국면에서도 같은 상황을 보았다. 관망하던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을 표결하고 보수적인 헌법재판소가 이를 수용한 것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거센 항의와 압력 때문이었다.

“지난 수년 동안,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이 ‘기다리라’는 말은 거의 항상 ‘안 된다’는 걸 뜻한다…너무 오래 지체된 정의는 정의에 대해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오랫동안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부정된 것이다”

흑인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과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싸우는 한국의 동지들에게 이미 고인이 된 킹 목사가 전해주는 말 같다. 6월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이다. 자긍심을 지키는 길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닐까. 48년 전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의 거리에서 싸웠던 성소수자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