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2)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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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공자의 생활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거론되는 작품이며 거론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김상환 교수는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김수영론』에서 “이 시에서 김수영은 자신의 운명과 인생의 여정 자체에 대한 프로그램을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사물의 생리와 한도에 다가서는 접근의 노력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자(朱子)는 이를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했다”(154)면서 성리학적 정신과의 연관성을 암시했다. 특히 5연이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논어(論語)』, 「이인(里仁)」)라는 언명을 상기시킨다며 김수영에게 전통 지향과 근대 지향이 공존하고 있음을 말하곤 한다. 물론 이 전통 지향은 과거에 대한 회귀 본능이라기보다 근대에 대한 비판적 준거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1연 1행에서부터 면밀히 검토하지 않으면 전체 의미가 모호해질뿐더러 이 시가 갖는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실제 이상으로 부풀릴 필요는 없다.

1연 1행에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는 현상을 자연계에 기대 생각하게 되면 처음부터 우리는 김수영의 제스처에 휘말리게 된다. 실제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는 식물’이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 묻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김수영이 모더니즘을 방법론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적 ‘장난’을 도입했으며 이 작품의 난해성은 모더니즘을 수용하는 과정 중에 벌어진 김수영의 혼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은 2행의 “너”가 누구냐는 추론에 따라 달라진다. 이 시의 제목은 ‘공자의 생활난’이다.

따라서 “너”나 “나” 중 누구는 공자일 수 있다. 아니면 역사적인 ‘공자의 생활난’을 빗대 작품을 구성했을 수도 있다.

우리의 해석에서 1연 2행의 “너”는 바로 공자다. 그리고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핀 형상은 자연계의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관념적인 형상이다. 우리가 자연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꽃의 최종 지점은 바로 열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핀 형상은 꽃의 최종 지점인 열매를 넘어선 ‘다른’ 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최종 지점, 즉 한계를 돌파한 어떤 상태를 김수영은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필 때”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김상환 역, 민음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끝에까지’라는 말은 여전히 어떤 한계를 정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계, 즉 경계가 가리키는 것은 사물을 하나의 법칙 아래 묶어두는 어떤 것도, 사물을 끝마치거나 분리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모든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105)

『논어』 「옹야」 편은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을 전한다.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못 미치고, 지혜로운 사람은 즐기는 사람에 못미친다者不如智者, 智者不如樂者”. 우리는 2행의 “줄넘기 장난”을 일종의 ‘즐김(樂)’ 혹은 ‘놀이’로 읽을 수 있다. 꽃의 최종 지점으로서의 “열매”라는 ‘한계’를 “사물이 자신을 펼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은 곧 “줄넘기 장난”과 같은 일이며, 그것은 곧 4연에서 말하는 ‘사물을 바로 보기’를 통해서만 그 가능성이 열린다. 따라서 ‘사물을 바로 보기’는 김수영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시인으로서의 사명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책세상)의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이다. 간략히 요약하면 “짐을 넉넉히 질 수 있는 정신”을 니체는 ‘낙타’로 비유하고, 존재의 짐을 지우려 하는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하는 존재가 ‘사자’인데, 사자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가치의 창조, 쟁취, 적어도 그것을 사자의 힘은 해낸다”고 말한다. 다음 단계가 ‘어린아이’인데,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그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그리고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38-41) 물론 김수영이 아직 접해 보지 못한 니체의 정신을 자신도 모르게 선취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정신의 세 단계’가 「공자의 생활난」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는 것도 타당성이 적지 않다. 분명 김수영은 “줄넘기 장난”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여기서 김상환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에 의하면 “사물 자체에 또는 도(道)에 이르렀을 때, 삶은 그 현장성을 잃어버린다.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은 공자의 말이고, 그것이 또한 김수영이 택한 삶의 여정이다. 완성된 시쓰기를 희구하는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 예감한다. 이 시는 그건 예감 안에서 시인이 갖게 된 공자와의 동지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공자는 그의 <동무>인 것이다. 여기서 시쓰기의 완성과 공자의 구도(求道)는 다르지 않다. 참된 시, 그 <발산하는 형상>은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씌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씌어졌을 때 시인은 죽을 것이다.”(154-155)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과연 “발산하는 형상”을 단순히 시에 국한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 이 작품이 이런 추상적인 가치를 표하는 것이라면 작품으로서의 미달이라는 일부의 평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시이게 하는 것은 2연과 3연이다. 먼저 2연에서 김수영은 1연에서 제기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같은 경지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토로한다. 자신도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꽃이 열매의 상부에 필 때”를 구하였으나—“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고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단어는 “작전”이다. 이 말은 곧 그만큼 치밀한 기획과 행동, 그리고 용맹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우리는 이 “작전”을 김수영이 평생에 걸쳐 추구했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하게 될 것이다.

3연에서는 그 ‘어려움’의 원인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기분열 때문이다. “국수”를 “마카로니”라고도 부를 수 있는 변화된 현실을 시적 자아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김수영은 “국수”를 먹기 쉽다고 말하면서 “마카로니”가 상징하는 탈영토화의 바람에 거역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비록 그것이 자신이 충동적으로 가진 “반란성”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4연에 와서야 김수영은 이 모든 것을 “0”에 놓아야 한다는 현실인식에 도달한다.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바로 봐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4연의 “동무”가 누군지는 명확치 않고 그리고 크게 중요하지도 않지만 김상환 교수의 해석대로 “동무”를 공자로 봤을 때 이 작품은 조금 더 유기적인 구조를 갖는다. 이 작품의 내용을 산문적인 문장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 “동무”(공자)처럼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필 때” 같은 “발산하는 형상을 구했으나” 나는 그 어려운 “작전”을 구사할 만큼 자라지 못했다. 그래서 먼저 ‘사물을 바로 보기’부터 하겠다. “국수”와 “마카로니”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나의 현실을 먼저 인식, 이해하겠다. 그런 다음 죽음이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김수영이 여기서 죽음을 언급한 것은 일종의 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 김수영은 태평양 전쟁 징집 위기나, 만주에서의 귀환,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이념적, 정치적 혼돈을 겪으면서 죽음을 가체험했을 수도 있다. 그 내적 복잡함이야 우리가 쉬 넘겨짚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죽음이 곧 삶의 거울이라는 인식만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공자의 생활난」을 이렇게 해석했을 때, 「묘정의 노래」에서 보여준 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슬픔의 정조는 「공자의 생활난」에 와서 어떤 ‘도약’을 보여주는 것이 드러난다. 이 도약은 목숨을 건 도약이다. 마지막 5연을 한 행으로 맺은 것은 김수영 자신의 내면에 팽배한 어떤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시를 쓴다는 일은 이런 내적인 목숨을 거는 일인지 모른다. 내적인 목숨을 건다는 것은, 기왕의 자신을 죽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목숨을 싹틔우는 일이다. 이게 바로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들뢰즈)의 요체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