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내려! 이 나라에서 나가! 세금도 안 내는 것들이!”
지난 5월 26일 오후, 오리건 주 최대 도시인 포틀랜드의 한 통근열차 안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메모리얼 데이(미국의 현충일, 군사작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로 매년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다) 연휴를 맞아 집으로 향하던 승객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백인 남성. 그는 두 소녀에게 인종혐오 발언을 퍼붓고 있었다.
나중에 16세, 17세로 밝혀진 이 소녀들은 난데없는 봉변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한 명은 흑인이고, 다른 한 명은 히잡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남성을 제지하기 위해 기차 안에 있던 다른 남성들이 나섰다. 소녀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백인 남성의 분노가 그를 제지하던 사람들에게 향한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칼로 자신을 제지하던 남성들의 목을 차례로 찔렀다.
이 사건으로 두 명이 사망했고, 한 명은 칼날이 급소를 단발의 차이로 비껴가 생명은 건졌지만, 심각한 상해를 입었다. 숨진 탈리신 남카이 메쉬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23세 청년이었다. 환경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피 흘리며 쓰러진 자신을 부축해준 사람에게 이 기차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희생자인 리키 베스트는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23년 동안 군에 복무하다 전역한 퇴역군인이다. 그는 ‘메모리얼 데이’ 주말에 백인우월주의자 손에 죽임을 당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은 21세 청년 미카 플레처이다. 고등학생이던 2013년에 무슬림 혐오를 반대는 내용의 시를 써 경시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다. 자폐증이 있는 그는 인종차별과 편견,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시를 쓰고 있다고 한다.
포틀랜드는 북서부에 위치한 미국의 리버럴한 도시 중 하나이다. 그곳에서 이슬람교의 라마단 기간 첫날에 벌어진 인종혐오 사건은 다시 한번 미국인들을 충격과 비탄, 그리고 분노에 빠뜨렸다.
사건이 일어나 바로 다음 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모임에 천여 명이 모였다. 히잡을 쓴 여성들을 비롯해 다양한 연령과 인종이 함께 했다. 목숨을 걸고 증오에 용감히 맞선 희생자들을 영웅이라 부르며 추모하고, 동시에 혐오 범죄의 타깃이 된 소녀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종혐오 범죄 침묵해 온 것처럼 트럼프는 이번에도 처음에는 포틀랜드 비극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한 사람들이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희생자들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심지어 희생자 중 하나는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 주말에 살해된 퇴역군인임에도!) 트럼프를 비판하자, 사건 후 사흘이 지난 월요일 아침에야 마지못해 트위터에 짧게 논평을 남겼다.
“금요일 포틀랜드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공격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증오범죄의 근본적 이유인 이슬람 혐오나 인종 혐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동하고 있는 일이니 말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범인인 35세 제레미 크리스쳔은 체포된 직후 경찰에게 “이제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며 “나야말로 애국자라고 법정에서 말할 것이다. 내가 찌른 사람들이 다 죽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며칠 후 첫 인정심문을 위해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표현의 자유(free speech)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여기는 미국이다. 미국의 적들이여, 표현의 자유가 싫으면 이 나라를 떠나라! 당신들은 나의 행동을 테러리즘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나의 행동을 애국심이라 부르겠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표현의 자유 옹호자(?)답게 크리스쳔은 평소에도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아 왔다. 그는 소위 ‘외로운 늑대’가 아니라 백인우월주의자로 제법 알려진 사람이었다. 범행 전부터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는 유태인과 무슬림에 대한 반대 등 인종 혐오와 여성혐오 표현으로 가득했다.
그는 포스팅에서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정부 청사를 폭파한 극우 테러범 티머시 맥베이를 ‘진정한 애국자’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는 나치에 동조하는 입장을 SNS로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극우단체 집회에도 여러 차례 모습을 나타냈다. 가장 최근에는 4월 29일 포틀랜드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를 위한 행진’에 참여했는데, 성조기를 온몸에 두르고 나와 나치 경례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집회 내내 야구 방망이를 들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위협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치에 반대하는 시위에 모인 사람들을 야구방망이로 공격하려고 했다고 한다.
한편 시 전체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극우 ‘대안우파(Alt-right)’는 6월 4일에 잡혀 있는 ‘트럼프 표현의 자유를 위한 집회’를 예정대로 포틀랜드에서 강행하겠다고 선포했다.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일까.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겠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이 집회의 조직자는 자신들은 범인 크리스쳔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사건을 핑계로 자신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며 집회를 강행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포틀랜드 시장이 직접 나서서 집회 허가를 내준 연방정부에게 허가취소를 요청했지만, (집회 장소인 공원이 연방정부 관할 지역), 연방정부는 적법한 절차를 따라 발부한 집회허가서를 취소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렇듯 트럼프의 당선으로 더 기세가 등등해진 극우 인종주의자들은 점점 더 공개적으로 나서며 지지자를 규합해 세를 늘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표현의 자유’라는 핑계로 자신들의 혐오와 폭력 선동을 정당화한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 캠퍼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하나인 버클리 대학교에서 최근에 벌어진 일은 시사적이다.
지난 2월 버클리 대학의 공화당 학생그룹이 주도해서 극우 매체인 <브라이트바트>의 전(前) 편집장인 마일로 이야노플로스를 연사로 초대했다. 이야노플로스는 무슬림, 페미니스트, 트랜스젠더 등 소수자들을 모욕하고 그들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선동해서 트위터에서 영구 추방된 극우인사다. 강연 소식이 알려지자, 나치의 혐오선동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즉각 행동에 나섰다. 먼저 학생들은 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백인우월주의자 강연을 허가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학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행사 당일 이야노플로스 강연을 저지하기 위해 2,000명이 넘는 학생이 모였다. 학생들은 “인종주의자를 위한 공간은 없다”, “모든 혐오에 반대한다”, “난민들을 환영한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했고, 강연은 결국 취소됐다.
하지만 학생들의 정당한 행동에 모두가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바로 트위터를 통해 “버클리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심지어 보복으로 대학에 대한 연방정부 기금을 중단하겠다는 암시를 하기도 했다. 학교 측과 뉴욕타임즈를 위시한 주류 자유주의 언론도 이야노플로스가 극우 인사이긴 하지만 그의 강연을 막은 학생들의 행동은 과도하다며, 다른 의견과 관점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런 입장은 극우파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단순히 다른 의견이나 관점의 제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제레미 크리스쳔에게 표현의 자유는 인종혐오 발언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극우 선동가 이야노플로스의 버클리대 방문 목적 중 하나는 서류미비자 학생들에게 대학 캠퍼스가 안전한 은신처를 제공하는 ‘이민자 보호 캠퍼스(santuary campus)’ 운동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또한 극우 백인우월주의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오로지 자신들만 누릴 수 있는 권리인 듯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로남불이다. 불행히도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극우파의 표현의 자유는 존중하면서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는 같은 무게로 취급해 주지 않는다. 다음의 예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린스턴 대학 교수이자 사회주의자인 키앙가 야마타 테일러(Keeanga-Yamahtta Taylor)는 최근 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트럼프를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과대망상가’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무너져 트럼프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미국 사회의 모순과 기성 정치인들의 배신과 실패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트럼프 시대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선 함께 싸우며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발달과 의미에 대해 분석한 책인 <블랙 라이브스 매터부터 흑인해방까지>(From #BlackLivesMatter to Black Liberation)의 저자이기도 한 테일러 교수의 이 연설을 미국의 대표적인 우익 언론사인 폭스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단 며칠 만에 그녀는 50개가 넘는 협박성 이메일을 받았다. 결국 신변의 안전 때문에 이미 잡혀져 있던 시애틀과 샌디에이고 연설을 취소해야 했다.
강연을 취소하면서 낸 성명에서 흑인 여성이며 레즈비언인 테일러 교수는 폭스 뉴스의 보도 후 온갖 인종적,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모욕과 욕설이 가득한 이메일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연을 취소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와 가족을 대상으로 한 린치와 총격 협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지 않겠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직 우리편의 진정한 강점이 그 규모와 효과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은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다이내믹을 바꿔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모든 편견에 맞서는 대중운동을 이 나라에서 건설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굴하지 않고 그 프로젝트에 계속 헌신하고 있다.”
극우 인사 강연을 캠퍼스에서 몰아낸 학생들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비판하던 주류 리버럴 언론은 정작 테일러 교수가 당하는 일에 대해서 큰 반응이 없다. 성난 학생들에 직면했던 극우 선동가 이야노플로스보다 더 큰 실제적인 위험에 직면한 것은 소수인종에 대한 학살과 폭력의 역사를 점철해 온 미국에서 흑인이며 여성 그리고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테일러 교수다.
인종주의와 이민자 혐오를 조장하고 성소수자와 여성들의 권리를 공격하는 극우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관대해도, 이에 맞서 싸우는 좌파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게 불행히도 미국 주류 언론이 보여주는 이중 잣대다. 극우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극우의 표현의 자유가 폭력을 행사할 자유라면, 우리의 표현의 자유는 그들의 폭력과 혐오 선동을 단결된 힘으로 저지하는 것이다. 버클리대 학생들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