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오토바이 아저씨, 칼갈이 아저씨, 평화의 성자. 성주에서 최영철(59) 씨는 여러 이름을 얻었다. 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소설에 나오는 ‘조르바’를 닮았다. 욕구에 솔직하다.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믿는다. 계산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간다.
매일같이 저녁 촛불집회에 나오는 그를 인터뷰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어렵사리 약속을 잡은 1월 어느 날,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저녁집회에야 만났다. 왜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눈이 와가지고”. 2월 다시 약속을 잡고 눈이 내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여전히 전화는 받지 않았다. 다시 공치는 것일까. 그는 태연히 화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한사코 카페에는 들어가지 않으려 해 평화나비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 도중에도 불쑥불쑥 소성리 집회 가는 걸 까먹었다며 일어서려 했다.
그는 휴대전화 대신 숫돌을 들고 다닌다. 왜관, 구미, 대구, 김천, 상주 여러 도시를 떠돌며 칼을 간다. 남는 시간에는 무료급식소 봉사를 갔다. 2016년 7월 사드 반대 투쟁을 시작하면서, 1인시위, 서명받기, 집회 참여가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됐다. 투쟁이 그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가 열리면 가장 앞에서 디젤기관차 경적을 울리듯 위아래로 팔뚝질한다. 구호를 외치는 소리도 힘차다. 그러다가도 몸을 써야 하는 율동 시간이면 손팻말만 흔들다가, 요가하는 시간이면 급기야 말없이 자리를 뜨곤 했다. 다리를 다쳐 자유로운 동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하고, 싫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드 투쟁에 자신을 쏟아붓는 그의 욕구는 무엇일까. 그는 ‘평화 잔치’를 꿈꾼다고 했다.
자유인 최영철
가난 이기려 넝마주이에 섬유노동
철도청 선로반에서 칼갈이까지
어릴 적부터 그는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답답한 마음에 3학년도 되기 전에 그만뒀다. 책상에 앉아 선생님 말씀을 듣는 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벤또는 등굣길 산등성이에서 까먹었다. 집에 알리지 않고 무단결석을 이어갔는데, 선생님이 집에 연락하자 그길로 자퇴했다. 한글은 미쳐 다 떼지 못했다. 노는 것이 좋았다.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 노는 것도 좋았다. 지금은 없어진 감삼못에서 낚시를 하거나, 집 근처 내당동 허름한 사보이극장 앞을 서성였다. 쌀배급 타려고 송충이도 잡으러 다녔다. 비산동 기찻길에서 노는 게 가장 좋았다. 철길에 못을 올려놓고 잠자리나 매미를 잡았다. 할 일 내팽개치고 놀다 오면 엄마한테 혼나기가 부지기수였지만, 그래도 철길은 틈나면 찾았고 철도청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도 키웠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았지만, 돈벌이는 해야 했다. 4인 가족 모두 형편없이 못살았다. 아버지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엄마는 아이스케키 도매상을 했지만, 돈이 안 됐다. 제일 큰 게 100원인데 남는 게 없었다. 그는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품앗이를 나가며 식은밥 얻어먹고 근근이 살았다. 온 가족이 다 벌어도 입에 풀칠만 했지 셋방살이를 면키 어려웠다.
열여덟 살이 되며 직물공장에서 꾸리를 감았다. 부대에 실 가닥을 잡아 걸고 빙빙 둘러 감는 일이다. 오른손으로 꾸리를 돌리고 왼손으로 실이 엉키지 않도록 조정해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없는 날에는 미나리꽝에 나갔다. 일당을 6천 원. 막노동을 뛰면 조금 더 많은 8천 원을 받았다. 괜찮은 여자를 만난 것도 직물공장에 나가기를 즐겼던 이유다. 일하다가 친해진 여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결혼에 반대했다. 몇 번을 더 만났지만, 허락은 받지 못했다. 1985년도에 고령으로 거처를 옮기고 10년 후,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쉽게 결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의심 없이 돈을 건넸더니 중국 하얼빈에서 온 여자를 소개받았다. 조선족 이영자라고 했다. 최영철 씨 눈에 그 여자는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뻤다. 형님이 준 집을 탐냈다. 영철 씨 이름으로 된 집은 아니어서 형수가 도로 가져갔다. 그러자 그 여자도 도망갔다. 배신감을 느낀 최영철 씨는 그 후로도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2001년 들어서 꿈꿔왔던 철도청에서 일을 시작했다. 1999년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것이 최영철 씨의 마음에 남았다. 힘들지만, 철도청에서 일하면 주변의 인정을 받았다. 선로반에 들어가 선로 보수 일을 맡았다. 철길에 기름을 치고 자갈도 퍼 날랐다.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다 보면 그 옛날 선로에 못 따위를 올려놓고 놀던 시절이 생각나는 듯도 했다. 밥은 도시락을 싸 와 불 지펴 데워먹었지만, 꿈에 그리던 직장이라 그저 좋았다. 고령에서 대구역까지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던 최영철 씨는 사고로 직장을 그만뒀다. 퇴근길 중앙선을 넘어온 자동차와 충돌해 대퇴부가 세 동강 났다. 병원 치료에 1년이 걸렸고, 그 후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퇴직할 때 기분을 설명하는 그의 눈이 회상에 젖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꿈에 그렸던 직장을 그만두는 심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2005년 성주군 월항면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고향으로 와야 할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성주 성산리 출신이다. 효도할 어머니는 없으니 어머니 고향에서 봉사라도 하고 싶었다. 고령 살 적에도 성주장 구경을 자주 오곤 했다. 예부터 참외와 수박이 좋았던 성주에 와서는 참외밭에서 일하는 것도 쏠쏠했다. 일당 8만 원을 받았고, 일이 하고 싶을 때는 섬유공장에 가서 절포도 했다. 다리가 성치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영철 씨가 돈을 벌게 된 계기는 칼갈이를 시작하면서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 칼갈이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나왔는데 마음이 끌렸다. 밑천도 딱히 필요 없는 데다 일도 자율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3천 원 받을 때 최영철 씨는 1천 원에 칼을 갈았다. 성주뿐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 식당까지 돌면서 칼을 갈다 보니 형편이 나아졌다. 그러면서 2009년 선남면으로 옮기며 땅도 마련했고, 움막집도 지었다. 최영철 씨는 노력해 마련한 땅에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소쿠리 땅, 헤엄치는 잉어, 탐스러운 나무 열매, 꽃피는 봄···
애국자 최영철
애국자를 배신한 국가
2016년 겨울 어느 날,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최영철 씨 나이를 알고 놀란 일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승복을 입고 다니는 사철사 주지스님인 김충환 사드배치철회성주투쟁위 공동위원장과 또래였다. 그러고 보면 비슷한 점도 있었다. 김수상 시인은 최영철 씨를 칼 가는 성자, 평화의 성자라고 했는데, 복장만 보면 파계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장 작업복 같은 회색 재킷에 회색 바지, 개장수 모자를 유니폼으로 입었다. 손수 쓴 사드 반대 손팻말을 들고 절룩거리며 걸어갈 때는 천로역정을 걷는 순례자 같기도 했다. 과거 ‘애국자’였다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박정희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대통령과 시대 상황을 줄줄 꿰며 말하는 그에게 물었다. ‘나라 사정을 어찌 그리 잘 아세요? 나라가 잘 해주서 애국하셨나요?’
“대통령들이 다 도둑놈들이더라고. 대통령이 잘못됐지 나라는 잘돼야지”
“나라가 도와준 게 있습니까?”
“있지. 내가 월항있을 때 물에 빠진 사람 하나를 구해줬거든. 그러니까 훌륭한 시민이라고 표창 주더라니까”
“아니 그건 당연히 받는 것이고, 아저씨를 도와준 건 뭐냐고요”
“아. 하나 있다. 있어. 교통사고 나서 하수구에 빠진 노인을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말을 들었어”
박정희 시절 최영철 씨는 유치장에 구치됐다. 1965년 통금 시간을 어겨 귀가하다 대명동 즉결재판소에 끌려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벌금을 내는 대신 최영철 씨는 3일 동안 구류됐다. 1967년 이수근이 귀순했고, 길거리에는 이수근이 대구에 왔다는 삐라가 나뒹굴던 시절이다. 그때 최영철 씨는 교도소에도 갈 뻔한 일이 있었다. 도둑질인 줄도 모르고 도둑놈 인줄도 모르고 누가 망 좀 봐달라는 얘기를 들어줬다. 망을 보고 있으니 고맙다면서 두 사람이 인사하고 지나갔다. 어찌 알았는지 파출소에서 최영철 씨를 연행해갔다.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항변해 풀려났다. 가장 억울한 일은 대구교도소에서 8개월 수형 생활을 한 일이다. 철도청에서 일하던 시절, 오토바이로 퇴근하던 길에 사고가 났는데 정작 들이박은 사람이 최영철 씨를 보험사기라며 신고했다고 한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었다. 그리고 직장도 잃었다. 2016년 최영철 씨는 대구지방법원에 해당 사건을 재심 청구했다. 변호사도 없이 청구했는데, 법원에서는 연락이 없다. 국가는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최영철 씨는 애국자라고 한다.
박정희 시절 공안 몰이가 무서웠다. 전두환 시절 5.18 학살 직후 친척 걱정에 광주를 방문했을 때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작살날까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김영삼은 IMF가 와서 힘들었고, 이명박은 4대강 때문에 싫었다고 한다. 정치인은 믿지 않게 됐지만, 여전히 나라는 사랑한다는 최영철 씨. 이제 최영철 씨의 나라 사랑은 ‘속이는 정치인’을 믿는 것에서 ‘사드 반대’가 됐다.
엄마의 고향 성산
맨주먹으로 와서 꾸린 살림
군수에게 느낀 배신감
사드는 몸으로 막는다
성주는 최영철 씨에게 고향보다 소중한 곳이 됐다. 참외의 고장, 맨주먹으로 와도 살 수 있는 곳, 여생을 살다 묻힐 곳이자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2016년 7월, 여느 때처럼 칼을 갈기 위해 선남면 고개를 넘을 때였다. 오전 10시께였나, 성산포대 주위를 도는 헬기 두 대를 발견했다. 성산포대 사드 배치 공식 발표 전이었지만, 최영철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12일 성밖숲에서 급히 열린 집회에도 참여했다. 13일 성산포대에 사드를 배치한다는 국방부 발표를 듣고 군청 집회에 갔던 최영철 씨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우리 엄마 고향 사람 다 죽겠다”
발표 며칠 전 봤던 헬기에 ‘황교안이나 한민구가 타고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군수가 막아주길 믿어야 했다. 군수 부인은 봉사 활동하며 여러 번 봤던 사람이고, 군수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15일에도 영철 씨는 군청에 갔다. 한민구 장관과 황교안 총리가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모인 군중을 보니 앞쪽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한민구 장관 얼굴을 보고서 억눌렀던 분노가 돌연 폭발했다. 들고 있던 물병 두 개를 한민구 장관에게 던졌다. 학생들의 물병도 그 뒤를 따랐다. 물병 던지는 모습이 카메라에도 잡혔던 것 같은데, 이날 이후에도 경찰이 소환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최영철 씨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물병 투척 이후 시간이 지나 장관과 총리가 도망갔다. 총리는 도망가는 길에 차 한 대를 들이박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게 정치인이었다. 김항곤 군수는 사드 반대 혈서를 쓰고 삭발도 하더니 결국 제3부지로 사드를 보냈다. 군수 부인을 봉사 활동하면서 만나 칼도 갈아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며, 눈앞에서 삭발하고 혈서 썼던 군수를 믿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8월 22일 군수가 제3부지를 요청하자 영철 씨는 군수를 마음에서 지웠다. 초전 사람을 버린 게 가장 실망스러웠다. 영철 씨는 만약 군수였다면, 탈당부터 하고 사드를 막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당도 마찬가지였다. 성주에 와서 사드 반대를 외친 국민의당,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발을 뺐다. 문재인이 사드를 막아주리라 믿지만, 만약 모르쇠한다면 다시 분노할 것이라고 한다.
영철 씨는 사드를 막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백악관에 보낼 사드 배치 철회 요구 서명을 받으러 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칼 갈며 돌아다녔던 지역부터 인근 공단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훑으며 서명지를 돌렸다. 촛불집회는 물론 여러 지역 집회에도 지치지 않고 참여했다. 최영철 씨는 마지막 수단을 생각했다. 몸으로 길목을 막는 것이다. 마을회관 근처에 컨테이너를 설치해준다면 포크레인이고 트럭이고 몸으로 길목을 막을 계획도 세웠다.
상황이 비록 험난해져 가지만, 기쁨도 발견한다. 여느 때처럼 칼을 갈러 돌아다니면 많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고 한다. 아저씨가 최고라고, 가끔 위로를 건네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최영철 씨는 되새긴다. 사드를 물리칠 때까지 끝까지 남아 싸우겠다고. 아저씨가 있어서 사드 막을 수 있었다는 한마디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일을 늦게 끝내고 새벽 2시에 귀가한 2016년 12월 어느 날, 영철 씨는 꿈을 꿨다고 한다. 사드 투쟁에 나서면서, 방 문짝에 붙은 어머니 사진을 보며 매일 빌었으니 그 꿈은 분명 어머니가 선몽한 것이라며 짐짓 들떠 말한다. “사드 철회 좀 해도, 박근혜 한민구 저승으로 좀 붙들어 가도”라며 밤마다 빌었다는 최영철 씨. 그날 꾼 꿈 얘기로 파란만장한 투쟁담을 마쳤다.
“내가 꿈을 꿨다니까. 성주 사람들 전부 모여 평화 잔치를 벌이는 꿈을 꿨다니까. 내가 음식을 나누고 사람들한테 나르고 있었다니까. 사람들이 즐겁게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더라니까. 나는 열심히 음식을 나르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웅덩이가 하나 있더라니까. 그 웅덩이에 물고기들도 노닐고 있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