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2016년 7월 13일 국방부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이후 성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자파부터 남북관계, 한중관계 경색까지. 성주 주민들은 매일 촛불집회를 열고 있고, 성주읍내부터 마을 구석구석까지 사드 배치 철회를 바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2월말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이 국방부 부지로 바뀌었고, 국방부가 사드 포대를 반입해왔지만, 사드가 아닌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뉴스민>은 성주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만난 성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성주촛불열전]을 매주 월, 목요일 연재한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염채언(44)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염채언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보도를 봤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염채언 씨를 ‘통진당 재건세력’, ‘전문 시위꾼 등장’, ‘성주 북핵 옹호녀’라고 칭했다. 지난 12월 염채언 씨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소란스러운 어느 날 오후 대구의 한 카페. 염채언 씨는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애들 걱정은 되긴 했죠. 큰 애들은 상황 파악하는데 막내딸이 감성이 풍부해요. 엄마가 뉴스에 나온다고 하니 좋은 건 줄 알고 봤는데, 댓글 보고는 막 울었어요. 남편은 워낙 자기 속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한창 사드 반대 투쟁에 나서면서도 약국을 챙기랴, 4남매를 챙기랴 바빴기 때문일까. 소란 속에서 담담히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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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모퉁이 집 담장 안은 우리들 놀이터였다. 학교를 마친 친구들, 엄마가 들에 나가 심심한 아이들은 약속도 없이 모퉁이 집으로 모인다. 나이 먹기 놀이를 시작한다.
나이 먹기 놀이는 시작부터 손에 땀을 쥐어야 한다. 가위바위보에 이기는 팀이 유리하다. 0살부터 시작하지만 이기는 팀 아이들은 5살부터다. 나이가 많은 쪽이 적은 쪽을 잡으면 5살을 더 먹는다. 나이가 어린 쪽은 기둥부터 줄줄이 손을 잡고 있다면 나이 많은 아이를 잡을 수 있다. 100살이 되면 이기는데 같은 편 전부가 100살이 돼야 한다. 시멘트로 담을 두른 모퉁이 집은 담벼락을 따라 기둥이 적당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나이 먹기 놀이에 그 기둥을 썼다. 모퉁이 집은 낮에는 항상 비어있었다. 집 앞으로 난 시멘트 길을 넘어가면 바로 논이 나왔다. 농한기 논이 비었다 치면 그 논까지도 뛰어들어가곤 했지만, 누구 하나는 기둥을 지켜야 했다. 기둥을 치면 10살을 먹기 때문이다. 기둥을 지키는 아이는 잘 못 뛰는 어린아이가 맡을 때도, 잘 지키는 큰 아이가 맡을 때도 있었다.
마을 전체가 우리들 놀이터였다. 가로등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우리 동네는 밤마다 은하수가 펼쳐지고 별똥별도 이따금 떨어지는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우리는 여름에는 수영을, 겨울에는 눈썰매를 타며 놀았다. 가난했지만 어린 시절은 행복했고, 그리움이 됐다.
언제까지라도 마을에서 놀고 싶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언니들과 함께 광주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광주에 보냈다. 전남 보성 시골에서는 공부도 웬만큼 했지만, 광주에서 내 존재감은 시험 석차만큼 밀려났다. 고등학생 때까지 삶은 대입을 위해 놀이를 포기한 끔찍한 시절이었다. 단짝과 영화를 보는 게 그나마 낙이었지만, 마을에서 하던 놀이는 사라졌다.
대학에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나마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좌충우돌하며 생각보다는 몸으로 배우곤 했다. 92년 약대에 입학한 나는 보건진료활동 학회와 평범한 봉사활동 동아리를 시작했다. 진료활동을 나가는 진료소는 농민회 사무실에 차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운동권 학회였다. 꼭 운동권이 아니라도 그 시기 광주의 대학생에게는 학생운동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89년 조선대 故 이철규 학생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는 이도 있던 시대였다. 입학 직전 91년부터는 분신정국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해 5월에 열리는 5.18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에 나갔다.
학회 선배가 의기투합해 농민약국을 만들었다. 농민약국은 약만 팔지 않았다. 농민회 활동을 돕고, 마을진료·건강교육도 함께했다. 농사꾼의 딸인 나는 농촌에서 가난을 겪었던 사람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뼈 빠지게 일하던 부모님은 벼농사, 밭농사에 소도 키우고 누에도 키웠는데, 내가 대학갈 무렵 가족이 광주로 나오면서 보니 수중에 집 한 채 판 돈밖에 남지 않았다. 여하튼 나는 농민회가 잘 되면 농업 문제도, 가난 문제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들이 먼저 시작한 농민약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급여는 현실성이 없었고, 책임과 의무만 현실이었다. 동료 약사들에게 미안했지만, 부채감을 안은 채 약국을 나왔다.
별다른 직업 없이 2000년 국토종단 행사에 참여했다. 거기서 남편을 만나 그해 결혼했다. 그 사람 옆을 걸을 때 힘든 것을 잊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나보다. 같이 걷고 있는데, 그 사람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 보여줬다. <체게바라 평전>과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였다. 내 취향과 비슷한 책을 보고 호감이 커졌다. 단지 베스트셀러를 골랐을 뿐이었다는 사실은 결혼 후에야 알았다. 결혼까지 앞뒤 안 재고할 줄이야.
이듬해, 그의 고향인 성주로 들어왔다. 애초 이곳에 정착할 생각도 없었지만,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폐쇄적인 경북 분위기가 하루하루 새삼스러웠다. 이런 일도 있었다. 2012년 대선 당시, 약국을 찾아온 10년 단골손님 아주머니에게 박근혜를 안 찍을 거라고 얘기했다. 아주머니는 그날로 발길을 끊고 맞은편 약국으로 갔다. 말 한마디로 단골 가게 발길을 끊는 이 동네는 어떤 동네인가.
타지 생활 버팀목 된 농민회
세월호 참사 계기로 ‘함께하는성주사람들’ 결성
성주 생활 적응했더니 들려온 사드 배치 소식
광주와 달랐던 성주. 도통 적응하기 힘들었던 그때, 이재동 성주군농민회 사무국장(현 성주군농민회장,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 부위원장)을 만났다. 그를 통해 여성농민회 사람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게 꿈이었다. 꿈꾸던 관계만큼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버팀목이 됐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성주에서는 ‘함께하는성주사람들(함성)’이란 단체가 생겼다. 함성에는 나처럼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귀촌 생활 속 사회 활동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마흔 명 남짓한 사람들과 세월호 추모 집회를 이어가다 함성을 만들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눴다. 그렇게 어느새 나는 성주에 적응했다.
남편이 힘들어 보였다. 성주 삶에 한창 지쳤을 때 나는 남편에게 해남에 가서 살 거라고 말하곤 했다. 전남 해남 농민약국에서 일하며 매듭을 지어놓지 않고 성주로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에도 나을 것 같았다. 한옥을 만드는 목수였던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 사업에 몰두했다. 2014년, 대출을 받아 땅을 사고 공장을 지었다. 내성적이라 사업을 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을 시작하자 남편은 작업장 정상화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는 하나에 매달리면 다른 걸 신경 쓰지 못하곤 했다. 가끔 우울하다는 말은 했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한번 버텨보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 2년,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정착에 한창 매진하던 중 벼락같은 소식이 들렸다. 7월 13일 성산포대에 사드가 온다고 했다. 당장 친환경 먹거리 카카오톡방에 불이 붙었다. 100명 남짓했던 인원이 하루 만에 1,318명까지 불어났다. 수많은 말이 오가던 중 아이와 함께 등교를 거부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13일, 정하(41)는 당장 아들을 데리고 일인시위에 나갔다. 나는 소금을 들고 15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황교안 총리가 방문한 군청으로 향했다. 장관에게 소금을 뿌리려고 보니 이미 물병이 날아가고 있었다. 소금을 조금 뿌리다가 정보과 형사에게 빼앗겼다.
황 총리 일행은 항의하는 주민을 피해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황 총리 일행이 빠져나갈 성주군청 주차장 입구에 모였다. 답답한 마음에 나도 마이크를 들었다. ‘북핵은 사드 배치 근거가 될 수 없다. 미국에 대한 협상 카드다.’ 그 말 때문에 <조선일보>에게 북핵 옹호자라고 불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7월 말, 1318카톡방에서는 온갖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상황극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별고을광대 단장 기태(38)에게 연락했다. 기태는 상황극보다 율동을 제안했다. 그렇게 평화를사랑하는예술단(평사단)이 태어났다. 기태, 세림, 아진은 별고을광대 배우였지만, 다른 이들은 농사짓거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민중가요 ‘엎어버려’에 맞는 안무를 배웠다. 광장에서 반응도 뜨거워 좋았지만, 연습하며 부대끼는 것이 좋았다.
그 손 한번 잡았더라면
8월 22일은 평소보다 바쁜 하루였다. 김항곤 성주군수가 기자회견을 열고 국방부에 제3부지 검토를 요청했다. 이날 군청은 아수라장이 됐다. 항의하는 사람들을 피해 대단한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양 발표를 치렀다. 그 직후 주민 200명 정도가 같은 자리에서 제3부지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투쟁위 대변인 은하(42)의 울음 섞인 절규 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강당을 나선 군수는 그날 저녁, 촛불집회가 열리기에 앞서 군청을 폐쇄했다. 어수선한 하루였다. 나는 직접 가지는 못했다. 그날 낮에 남편과 통화한 이후 계속 연락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전날(21일) 남편의 행동이 갑자기 떠올랐다. 술에 취한 남편이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퇴근 후 공장으로 갔다. 잠시 남편을 찾다 보니 공장 달력에 남편이 뭐라고 글씨를 써 놓았다. “친구들아, 사드 반대하는데 같이 못 해서 미안하다.” 남편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우선 집으로 데려와 재웠다. 다음날 점심 즈음 남편에게 전화했다. 아직 충주 현장에 안 가고 공장에 있냐고 물었더니 짧게 답한다. “그래”
저녁이 되자 충주 현장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통화가 안 된다고 했다. 급히 전화를 걸어보니 받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고 위치추적을 부탁했다. 남편은 충주 현장이 아니라 대출해서 마련했던 그 공장에서 23일 발견됐다.
생각해보면 한 달 전쯤부터 우울하다는 소리를 했었다. 그 사람 상태가 어떤지도 생각 못 했다. 내가 현장에서 일하라고 뒤에서 떠민 거구나. 절벽에 서 있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나한테 손을 내밀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사십구재가 지났다.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상을 치르자 곧 주위에서 구설이 들려왔다. ‘두문불출하지 말라’, ‘지금 너는 남편 죽은 슬픔을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여러 말을 들었지만 소문에 연연할 여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는 옳았다. 12월, 김세환 전 성주군 부군수의 땅투기 의혹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였다. 변진섭 노래가 무심결에 떠올랐다. 가사를 곱씹을수록 가슴이 아려왔다.
그대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 힘에 겨워서
길을 걷다 멈춰진 그 길가에서 마냥 울고 싶어질 때
아주 작고 약한 힘이지만 나의 손을 잡아요.
따뜻함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줄게요.
사드는 삶을 망가트렸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치유했다
사십구재가 지나고부터 결정을 내려야겠다는 마음이 섰다. 애초 해남으로 가겠다고 남편에게 마음의 짐을 지웠는데, 남아 있자니 죄스러웠다. 아이들을 생각해도 그렇고. 마을공동체에 대한 바람과 농민약국을 중도에 나왔다는 부채감도 남아 있었다. 11월부터는 평사단 공연이 있는 날에도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자주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안 보인다고 생각할까봐. 미리 정리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어차피 끝까지 못할 텐데. 평사단 공연을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니 심란한 마음은 더 커졌다.
어느 날 평사단 단원 연주(43)가 영상을 보여줬다. 성주에서 함께 했던 장면들, 여름날 함께 비 맞으며 춤추던 순간들, 미소를 머금은 순간들이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저기에서는 함께하지 못했구나.’, ‘함께하지 못한 순간이 많구나.’ 책임져야 할 것들 사이에서 망설이던 나는 별안간에 마음을 굳혔다. 연주에게 말했다. 네 영상을 보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사단을 떠날 수는 없겠다고.
사드는 많은 것을 빼앗아 갔지만, 사람이 남았다. 촛불집회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평사단. 사드가 어떻게 끝나더라도 우리는 계속 만나게 될 거다. 이 사람들과 계속 더불어 살고 싶다. 모두가 같이 싸우고, 같이 웃고, 쓰든 달든 그 열매도 같이 맛봐야겠다. 나도 함께 맛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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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채언 씨는 마음을 굳히는 듯했지만,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염채언 씨는 2월 23일, 졸업 후 일하던 농민약국이 있는 해남으로 돌아갔다.
촛불에서 멀어졌다는 부채감 때문이었을까. 지난 3월 18일 소성리에서 열린 평화대회에서 염채언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주말마다 꼬박 성주를 찾으려 했는데 잘 안 되더라며 멋쩍은 듯 웃었다. 그는 17일 밤부터 이날 새벽까지 원불교 교무들과 함께 진밭골에서 연좌기도까지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옷은 새로 맞춘 평사단의 하늘색 셔츠다. 옷에서 훌쩍 다가온 봄 냄새가 났다. 염채언 씨는 이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