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얼마나 좋았다고 그새 꽃샘추위가 왔다. ‘착한’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낸다는 안도감은 그새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기온이 다시 영하로 떨어진 6일 오후 6시, 경산시 경산오거리에는 마스크와 피켓을 든 학부모들이 하나둘 모였다. 전국 유일 한국사 국정교과서 연구학교로 선정된 문명고등학교 학부모들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저는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이런 거 안 해봤어요”
올해 문명고에 입학한 자녀를 둔 이진리(가명, 46) 씨는 ‘X’가 그려진 마스크에 얼굴을 숨기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들이 착하기로 유명하다기에 진리 씨는 아들을 문명고에 보냈다.
입학식 후 정상 수업을 시작한 아들을 대신해 진리 씨는 피켓을 들었다. 진리 씨는 “차라리 우리 학부모들이 연구수업 받았으면 좋겠다”며 “아이들이 싫다는데, 정말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입생 자녀를 둔 박동욱(가명, 52) 씨도 “아들이 괜찮다고 하면 이렇게 나올 이유도 없다”며 “아이들이 싫다고 하니까. 3년 뒤면 다 군에 갈 나이다. 절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동욱 씨는 김태동 교장을 만났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언론을 통해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신청 소식을 알게 된 후 지난 3주 동안 학부모들이 김태동 문명중⋅고 교장을 만난 것은 지난 2일 입학식 파행 후 처음이었다.
그는 “교장 선생님이 하는 말 들어보면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며 “당장 철회가 아니라 유보라던가 협상의 여지가 있어야 하는데, 실컷 우리 이야기 다 들어놓고 안 된다고 하신다.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경산오거리에 가장 먼저 도착한 박나래(가명, 46) 씨도 거들었다. 나래 씨는 “나라가 먹통이라서 그러나 (학교까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집안은 조용해서 다행이라 그랬다”며 농담을 던졌다.
나래 씨 자녀는 지난 3년 동안 같은 재단 문명중학교에 다녔다. 집과 더 가까운 경산 내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했지만, 중학교 선생님들의 설득으로 올해 문명고로 진학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가 아이들 말을 들어줘야지. 책이 나왔으면 보고 생각할 시간을 주던가, 내년에 하던가. 그 과정이 지금 하나도 없다”고 꼬집었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에 한 손에 든 촛불은 흔들리고, 현수막은 바람에 날려 ‘국정교과서 즉각 철회하라’는 문구는 자꾸만 쭈글해졌다.
나래 씨는 “우리가 이렇게 매일 추운데 나와서 고생하는데 외부세력이 어디서 왜 나오느냐”며 지난 3일 <조선일보> 기사를 언급했다. 전교조, 민주노총 등 ‘외부세력’이 학교를 무단침입해 교장을 협박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근거는 학교 측이 제공한 CCTV 영상과 김태동 교장 인터뷰였다.
나래 씨는 “조선일보 기자는 한 번 와보지도 않고, 교장 선생님 말만 듣고 기사를 그렇게 썼는지 모르겠다”며 “전화해서 따졌더니 고객센터인가 그리로 돌려주더라. 너무 화가 난다”고 하소연했다.
진리 씨도 “이 문제를 왜 자꾸 정치적으로 몰고 가려는지 모르겠다. 시민단체에서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다 마다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기사가 나오니까 정말 속상하다”고 말했다.
대책위 활동을 하는 한 학부모에게는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문명고 3학년 자녀를 둔 양수희(가명, 47) 씨는 “지금 부모들 뒷조사하러 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설사 민주노총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아빠들 직장에 다 노조가 있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되냐”고 따져 물었다.
조선일보 보도가 나온 당일, 자유한국당은 ‘짓밟힌 문명고 올바른 교과서 국민 검증 역사 교과서’라는 이상한 문구를 내세우며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겠다고 밝혔다.
수희 씨는 “자유한국당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다고 하는데, 제발 하나 꾸려서 여기 와서 보라고 해라”며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학부모들이 경산오거리에 나와 피켓을 든 지도 사흘이 지났다. 학생, 학부모를 설득하겠다던 김태동 교장은 조선일보와 ‘외부세력 프레임’을 만드는 동시에 중학교 역사 국정교과서도 신청했다. (관련 기사 : 문명고 이어 문명중도 국정교과서 신청, 교장 “도서관 비치용”)
학부모 대책위 공동대표를 맡은 오 모(44) 씨 자녀는 문명중학교에 다닌다. 그가 문명고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지정 철회를 위한 대책위에 함께한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아들이 문명고로 진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회 중 이 소식을 들은 오 씨는 “정말 분통이 터지고 할 말이 없다”며 연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 선 학부모들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지만 손에 든 촛불을 놓을 수 없었다.
문명고는 지난 4일 역사 담당 기간제 교사 ‘긴급’ 모집 공고를 냈다. 1명뿐인 역사 담당 교사가 연구수업 거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국정교과서 수업을 반대하고 있다. 새로운 기간제 교사가 오더라도 국정교과서 연구수업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나래 씨는 이 말은 꼭 써달라고 기자에게 전했다.
아이랑 전학을 가고 싶어도 형편이 안 돼서 못 가고, 자퇴를 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서 못 해요. 정말 답답합니다
학부모들은 김태동 교장이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선정을 유보하거나 철회할 때까지 경산 시내 곳곳에서 촛불을 들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