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정치에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조금이라도 정치에서 눈을 돌린다면, 또 하나의 박근혜 대통령이 생겨날 겁니다. 정치에 항상 관심을 가지십시오.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
노란색 파커를 입고, 분홍색 귀마개를 한 10살 정하은 씨가 무대에 올랐다. 대구·경북 각지에서 찾아온 시민 3만 명이 연단 앞에서 하은 씨를 바라봤다. 또랑또랑, 당당하게 “정치에 눈을 떼지 마시라”고 당부한 하은 씨는 무대 옆 엄마를 찾아 내려오며 “생각이 잘 안났어”하고 아쉬움 섞인 말을 뱉었다.
26일 대구 중구 동성로 대중교통 전용지구(반월당네거리~중앙네거리)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촉구 4차 대구시국대회는 오후부터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5만여 명(경찰 추산 7,500명)이 운집했다. 무대는 10살 하은 씨에게도, 변호사, 운전기사, 고등학생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줬다.
하은 씨는 1차 대구시국대회 당시 화재가 된 송현여고 조성해(18) 씨 동영상을 보고 자유발언을 준비했다. 어머니 주태은(36) 씨는 “나는 어려서 저런 거 못하지 않느냐 해서 어려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고 했더니 하겠다고 하더라”며 “지난주에 나오려고 했는데 원고 쓰고 연습하느라 오늘 나왔다”고 하은 씨가 자유발언에 나선 계기를 설명했다.
주 씨는 “하은이 말대로 나이와 상관없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우리나라가 다시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치에 관심 가지시라”는 초등학생
“어머니한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고등학생
최범구(16) 씨는 오후 2시 30분께, 무대 설치가 끝나기도 전에 주최측을 찾아와 자유발언을 신청했다. 최 씨가 자유발언에 나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최 씨는 며칠 전 4살 위 누나와 함께 어머니와 크게 다퉜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남매에게 어머니는 대통령이 불쌍하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아버지가 중재해서 싸움이 끝났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대통령들이 다 그랬다고 하는데, 이번 대통령은 유독 심하잖아요? 저희들은 그래서 안좋게 보는 데, 어머니는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고 해요”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최 씨는 “어머니한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면서 “어머니는 오늘 제가 여기 나온 거 몰라요. 부산 가셨어요. 놀라게 해드리는 게 목표예요”라고 말했다. 시국대회 시작보다 2시간 반 일찍 나온 최 씨는 인터뷰를 마친 후 “지금부턴 카페에서 숙제할 거예요”라며 카페를 찾아들었다.
최 씨가 무대를 다녀간 후부터 조금씩 시민들이 집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3시부터 예정된 ‘하야하롹’ 콘서트는 굵어진 빗방울 때문에 준비가 늦어졌다. 하지만 차량통제가 이뤄지고 있던 대중교통 전용지구는 이 무렵부터 시민 수백 명이 모여 “박근혜 퇴진” 피켓과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각각 영천과 밀양에서 찾아온 박(여, 30대) 씨와 서(여, 30대) 씨는 삼성생명 건물 옆에서 촛불을 들었다. 박 씨가 “시국대회는 오늘 처음”이라며 “이번엔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나왔어요. 그전에는 시간이 안 되기도 했구요”라고 말하자 서 씨는 “검찰에서 (대통령도 )공범이라고 했잖아요. 그때부턴 확신이 생겼다”고 보탰다.
서 씨는 “솔직히 처음엔 못 믿었어요. 언론에 나오는 이야기가 너무 드라마 같잖아요. 처음엔 다 못 믿었는데, 계속 불거진 이야기가 스토리가 이어지잖아요”라며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박 대통령의 비위 사실에 놀라워했다.
70대 노인들도 대통령, 새누리당 규탄 나서
“새누리당은 분명히 정신을 뜯어고쳐야 돼”
나이가 지긋한 노년층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김항곤(72), 황금선(65) 씨는 딸과 함께 시국대회에 참석했다. 김 씨는 “새누리당은 분명히 정신을 뜯어고쳐야 돼”라며 “박근혜 눈치만 보고 말을 제대로 못 하잖아. 할 말은 해야지, 나라를 전체적으로 이끌어가려면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어야지”라고 목소리 높였다.
황 씨는 앞서 오후 1시부터 서문시장에 비슷한 연배의 대통령 지지자들이 모였었다고 말하자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기라. 쫓아내야 한다”고 격앙됐다. 김 씨도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안 되는 것”이라고 거들었다.
CGV대구아카데미 극장 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던 김윤기(77) 씨는 “지금까지는 경북 동향 사람이고, 관심이 있어서 지지를 했는데 돌아가는 사정을 봐서는 지지한 게 후회스럽고, 맹목적으로 따라간 게 아닌가 자괴감이 든다”고 박 대통령을 향한 지지를 철회했다.
김 씨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국민 된 도리가 아닌 것 같애.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 노력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 싶어서 나왔다”며 “최근엔 전부 거짓말 연속 아닙니까? 자기 어른들이 한 거에 먹칠하잖아요. 실망스럽습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보다 더한 10.26, 박정희 대통령 죽을 때도 대한민국 떳떳하게 살아나갔어요. 4.19 대혼란에도 건재했습니다”라며 “대한민국 기본체제가 이렇게 완벽한데 대통령 하나 우예 됐다고 해서 잘못될 거라고 생각 안 합니다. 우리나라 근간을 믿습니다. 대통령은 내려와야 됩니다”라고 대통령 궐위로 인한 국정공백 우려를 일축했다.
4차 대구시국대회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분노와 성토는 무대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았다. 대통령을 향한 분노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9) 할머니 발언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까짓 게 뭘 안다고, 지까짓 게 뭔데, 왜 나를 죽여”라며 “지까짓 게 뭔데, 죄를 지었으면 죄를 받아야죠. 죄는 지은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갑니다. 대통령 좋아한다. 우리 대구가 뽑았습니다. 대구가 끄집어내야 합니다. 절대로 그냥 둘 수 없습니다”라고 분노를 토해냈다.
저녁 6시 45분께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 대오 후미가 중앙파출소에서 발을 떼기까지 30분이 더 걸렸다. 1시간가량 진행된 행진이 끝나고 되돌아오자 시민 2만여 명이 더 늘어나 5만여 명이 자리했다. 고향 시민들과 함께하려 서울에서 내려온 방송인 김제동(42) 씨가 행진이 마무리되길 기다리고 있었다.